그러니 후두둑후두둑, 주룩주룩,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결코 하나의 소리만 낼 리 없다. 우리 귀가 어두워 들리지 않을 뿐, 그 속에는 무수한 존재가 저마다 비를 만나 만들어낸 다양한 소리들이 들어있을 테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그랬다. 전직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보자. 똑같은 어부라도 베드로 형제와 야고보 형제의 계급이 완전 달랐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강이나 호수에서 그물질로 생선을 잡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생계형 노동자라면,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가지고 바다로 나가 대량 어획을 하는 기업형 노동자였다.
특히 야고보 형제가 종종 ‘세배대의 아들들’로 불린 것으로 보아 그만큼 부친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나 할까.
이렇게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운동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은 예수가 일으킨 혁명의 바람이 그만큼 보편적인 침투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 우주적 혁명을 이루는 길에는 각자 나름의 욕망이 끼어들기 마련. 예수가 맨 처음 십자가를 입에 올리자 ‘수제자’인 베드로가 펄쩍 뛰며 막는다.
이 기세라면 예수가 로마제국보다 더 강력한 제국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 되면 자기도 ‘흙수저’ 신세를 면할 수 있을 텐데, 웬 십자가란 말인가. 예수에게 항의하던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호된 야단을 맞는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또다시 예수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심을 내비친다. 벌써 삼세번이다. 정말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나보다.
이번에는 야고보 형제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마가복음은 야고보 형제가 직접 건의한 것으로 나오는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청탁한 것처럼 묘사된다) 이 일로 다른 제자들이 ‘분개’했다는 말은 모두 엇비슷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에 예수는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미련한 제자들을 깨우친다.
복음서에서는 이들 3인방이 예수운동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마다 예수는 꼭 이들을 따로 챙겨서 데려간다. 안드레의 마음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겠다.
한데도 그런 조짐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아이의 도시락을 눈여겨 본 안드레 덕분에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그는 모나게 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숨어서 남을 배려하는 성격인가보다.
이렇게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예수를 만나 빚어내는 삶의 서사도 흥미롭지만, 이들과 만나 점점 자신의 ‘꼴’을 잡아가는 예수의 변화도 신통방통하다. 하기야 어느 생명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의 꼴로 남아있으랴. 무릇 살아있는 생명은 다른 생명과의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변화와 생성의 춤을 거듭하는 법이 아닌가.
고집부리지 말아야지. 편견을 신념이라 우기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목에 힘주지 말아야지. 누구 혹은 무엇을 만나든 ‘더불어’ 소리를 내야지. 활짝 열린 새해 첫 마음 위로 바람이 분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바람이.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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