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생명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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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이가 나무랄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며 안락하고 평화로워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면 그 어떤 것이든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남김없이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니 비대하거나 보이거나 안보이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이미 있는 것, 앞으로 태어날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자애경 외움을 마지막으로 새벽 기도가 끝났다. 법당 문을 나서니 저 멀리서 아침을 여는 성당 종소리가 들려온다. 천상의 음악 같다. 6시다. 여명이 조금씩 어둠을 걷어간다.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 아직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갑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초를 꺼내려 공양간 밖에 놓인 도구함 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고양이 한 마리가 후다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뜻하지 않은 사람의 출현에 그만 밤새 추운 몸을 녹여주던 따뜻한 보금자리를 들켜버린 것이다. 함께 있던 대중 막내 명진스님이 고양이를 향해 호통을 친다. “야 이 녀석아, 여기 들어가면 안돼. 어서 저리가!” 목소리에 성냄이 묻어난다. 위험하다.

 

도망친 고양이를 야단하는 그니에게 너무 나무라지 말고 좋은 말로 타이르라고 했다. 비록 우리가 원치 않는 행동을 했지만, 일체 생명에 대해 자애심을 가져야 한다는 완곡한 충고다. 저도 살기 위해 제 살 도리를 하는 것을. 얼마나 추웠으면 쫓겨날 줄 알면서도 거기 들어갔을까.

 

명진스님은 고양이를 두둔하는 나에게 항변하듯 저 녀석이 도량 여기저기 똥도 막 싸놓는다고 일러준다. 하긴 얼마 전 화단 앞에서 고양이 똥을 밟아 신발을 더럽히긴 했다. 명진스님 말대로 녀석의 소행인지도 모른다.

 

도량에서 가끔 마주치는 길 고양이들이 몇 있다. 내 보기엔 패션이 다 한결같이 노란 줄무늬라 구별이 잘 안가는데, 명진스님은 기가 막히게 구별한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녀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라본다. 마치 낯선 얼굴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살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일전에는 법당에 올려 진 화분을 보면서 정범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 ‘조경 전문가가 그러는데 이 애들은 따뜻한 온실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 여기가 추워서 벌벌 떨고 있다더라’고 말이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도처 유상수라더니, 스승 아닌 이가 없다. 화초들이 얼마나 추울까. 기도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스님들의 거처로 화분들을 몽땅 옮겼다. 따뜻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행여 그 사이 꽃봉오리가 얼어버릴까 노심초사했다. 화초들이 포근하고 따뜻한 공기에 행복해하는 듯하다. 며칠이 지나자 양란이 주황색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다. 참으로 생명은 신비롭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 생명들도 살아있을 때 까지는 늘 행복하기를!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거룩하다. 나비의 조그만 날개 짓 하나가 날씨를 변화시키듯, 생명을 향한 나의 작은 실천 하나가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법당으로 향하는 길에 또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원한 없고 적의 없는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길 위의 삶이 고달플텐데도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은 아침 햇살처럼 말갛다. 둘 사이에 소리 없는 편안함이 봄 공기를 타고 흐른다.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자애심이 꽃처럼 피어난다.

 

도문 스님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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