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영 작가는 1987년에 친구의 소개로 유치원 미술선생을 했어요. 그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죠. 겨우 네댓 살의 아이들인데, 너무나 순수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창의적이었던 거예요. 그 그림들을 모아 연구했어요. 하지만 그걸 자신의 작업 형식으로 받아들여 발표하지는 못했죠.
몇몇 작품들에서 간간히 내비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대중들 앞에 드러낸 것은 1995년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였어요. ‘숨결-숲에서’라는 주제로 기획된 이 전시는 그의 작품세계를 가름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죠.
먼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끌칼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예요. 끌칼은 목판에서 여백공간을 마무리하거나 다듬을 때 쓰는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칼이죠. 그런데 그는 형상을 깎는 것에서 여백처리까지 대부분 이 끌칼을 써요.
그래서 판화로 찍어져 나온 그림에는 매우 독특한 ‘태점’들이 난무하죠. ‘동방의 소리’라는 작품을 보면 두 개의 탑 사이에 태점들이 여백을 채우고 있음을 볼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여백의 힘은 줄지 않죠. 오히려 태점은 묘한 긴장상태를 조성하며 여백을 팽팽하게 확산시키고 효과를 드러내요.
‘숨결-문 밖에서’는 태점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형상을 규정하는 선들도 불규칙적일뿐더러 굵어서 크레파스를 꾹꾹 눌러 그린 아이들의 그림과 흡사하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여백을 어떤 음율의 태점들이 흐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또 이 작품에서는 유희적인 선들이 작품의 희화적 요소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죠. 유쾌한 상상으로 가득 찬 그림 속 이미지들과 어울려 자유롭게 교차하는 선들은 그의 ‘흥얼거림’과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는 목판에 직접 드로잉을 하는데, 드로잉 순간순간 화면 속 인물이나 동물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구성하면서 스스로 즐거워 자유로운 선을 그려 넣죠. 그 순간 그는 ‘어린아이’가 되기도 해요. 그것은 어떤 잡다한 의지들이 개입하지 못하는 순수의 상태이며, 바람과 물과 같이 자유로이 흘러가는 투명한 의식의 지점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의 많은 작품들에서는 새, 두더지, 호랑이, 말, 닭, 소와 같은 동물들이 등장해요. 의인화된 그것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그것은 생명 숨결에 대한 지속적인 작가적 세계의 어떤 의지일 거예요. 이야기는 대부분 현실 참여적인 메시지가 강하거든요. 종교적 측면에서 그는 순수의 상태를 찾은 듯 하고, 현실과의 관계에서는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가득한 것 같아요.
저는 어제 오래도록 투표소 문 밖에 서 있었어요. 우리 삶을 향한 정치인들의 이타적 정책이 눈에 띄지 않더군요. 한 표의 권리를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그때 떠 오른 작품이 이 작품이에요. 자기희생의 사랑을 펼쳤던 2천 년 전의 한 사람.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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