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만에 돌아온 정조대왕, 세계인 이끌고 능행차”
스승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공부에 몰두했고, 전교 수석을 차지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고 박목월 선생을 만나 시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문학을 공부하고자 진학한 대학에서 우연히 국악을 만났다. 그는 또다시 공부했고, 그것을 계기로 ‘화성재인청복원사업회 집행위원장’ ‘문화관광부 전통예술정책수립 TF위원’ ‘서울시문화도시정책자문위원’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문화체육관광부 한-EU문화협력위원회 자문단’ 등 국제적 감각을 갖춘 문화예술정책전문가가 됐다. 그런 그가 수원으로 왔다. 그리고 지금 수원을 공부하고 있다.
지난달 11일 취임한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의 이야기다. 특유의 집요함과 꼼꼼함, 하나에 몰두하면 끈질기게 파고드는 그가 수원의 문화와 예술을 공부한다. 그의 임기가 끝나는 2년 뒤 수원의 모습이 어떨지 기대되는 이유다.
Q 먼저, 지나온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A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란 옛 노랫말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청소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든지, “그때가 좋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저는 절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린나이에 부모님이 헤어지시면서 너무 힘겹고,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말에 ‘가출’이 아닌 ‘출가’를 했다.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개근 상장이 없다. 온갖 궂은 일로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초자 힘겨웠으니, 학교 가는 것이 가당키나 했겠나. 아마 결혼하기 직전까지 그런 시간들이 계속된 것 같다.
Q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나.
A 정말 운이 좋고, 복이 많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보살핌은 받지 못했지만,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무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사회과목 선생님이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는데 왜 여기서 맨날 이러고 있지?”라며 머리를 쓰다듬더라.
보통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고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선생님의 손길이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울컥 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더라. 그 후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공부를 했다. 생활비를 벌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고사 때 반에서 5등을 했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부르더니 부정행위가 의심 된다며 구타와 폭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욱하는 마음에 교무실 유리창을 깨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며 가방을 싸고 나왔다. 그때도 날 붙잡아 줬던 것이 그 선생님이셨다.
운동장을 달려가고 있는 날 세우시더니 “왜 이렇게 비겁 하냐, 억울한 것이 있으면 증명해야지, 이렇게 피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 어느 누구도 날 믿어주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여전히 날 믿고 계셨던 거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고, 전교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A 고등학교 때 선배의 추천으로 문학동아리에 가입하게 됐다. 얼마 뒤 박목월 선생님이 학교에 초청 문인으로 오셨는데, 제가 시를 발표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날을 시작으로 꾸준히 인연을 이어갔다.
그 뒤로 문학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됐다. 시, 평론, 논문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읽고, 쓰기 시작했다. 특히 시를 통해 내 삶은 극대화 됐다. 나는 시를 통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다. 그리고 보다 문학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영문학과를 가게 됐다.
Q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30여년을 근무했다.
A 첫 직업은 ‘월간 공간’이라는 문화예술전문잡지사의 기자였다. 잡지사 기자로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당시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 공연에 초대받게 됐다. 그때는 시와 클래식에 심취해있던 터라 국악은 그저 낯선 음악 장르 중 하나에 불과했었는데, 대취타나 종묘제례악 등을 연주하는 학생들의 공연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으로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고, 국악에서 느껴지는 품격과 격조에 완전히 매료됐다. 문득 ‘이런 음악을 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교원자격증을 취득해 뒀던 터라 이듬해 봄 서울국악예고에 영어교사로 취직하게 됐다.
Q 문화예술정책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A 어느 날, 학생들 진로상담을 위해 서울 종로서적에 갔는데, 국악과 관련된 책이 없더라. 그래서 일일이 인간문화재를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인터뷰 과정을 녹취하고, 공연을 보고, 기록하면서 점점 우리 음악과 우리 것이 심취하게 됐다.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문화예술대학원에 들어갔고,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하면서 이게 전공이 됐다.
Q 수원문화재단의 이야기도 해보자. 이제 취임한지 한 달이 됐다. 밖에서 봤을 때와 안에 와서 들여다보니 좀 어떠한가.
A 사실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직에 지원하고 난 뒤 면접 전에 몰래 수원에 왔었다. 이틀에 걸쳐 화성행궁, 어린이도서관, 호스텔, 아트리움 등 재단의 사업장을 돌아봤다. 많은 문제점들이 보이더라.
특히 취임이후 조직을 살펴보니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우선 사업이 너무 광범위 하다. 대부분의 지역 재단은 공연장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수원문화재단은 문화 예술에 관광까지. 정체성이 모호하다. 여기에 정직원 165명. 전국 어딜 가도 이러한 규모는 없다. 부서를 봤더니, 정책전략사업평가 부서가 없다. 한마디로 말해 하드웨어만 구축된 상태다.
또 홍보기능도 많이 약하다. 축제도 전문가 주도의 보여주기 식에 그치고 있다. 축제에 시민은 보이지 않는다. 광교나, 서부권역의 주민들이 이를 체감하고 있는지, 봐줘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제가 해결해야할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A 조직개편이다.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평가와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박수치고 돌아갔다고 해서 수원의 문화정책이 제대로 됐다고 보면 안된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일부분이다.
절대다수의 수원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그전에 인연이 있었던 화성재인청복원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수원은 현재 수원화성이라는 유형문화재에만 집중해 있다. 화성재인청, 무예24기 등 수원을 대표하고 수원화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무형문화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 올해 수원화성문화재의 하이라이트인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도 중요하다. 올해는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맞아 서울시와 협의해 정조대왕 능행차를 창덕궁서부터 수원화성행궁까지 그대로 재현한다. 하지만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면 안된다.
현대적으로 재창조 시키는 것은 물론, 전 세계인을 참여시켜 세계적인 축제로 키워야 한다. 220년 만에 돌아온 정조대왕이 세계인을 이끌고 수원에 온다면, 수원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겠나. 이런 생각들에 요즘 잠 못 이루고 있다.
Q 조직개편 방향은.
A 교직생활을 30여년 했다. 가장 큰 특기가 개인 면담이다. 우리 식구 단 한명도 빠짐없이 개별 면담을 할 것이다. 5~10분짜리 형식적인 면담이 아니다. 이미 이력서 검토를 끝냈다. 훌륭한 인재들이 많더라. 과연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는지, 단순히 스펙에만 가려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하나 역량을 알아보고, 자기 자리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직원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절망감 줄 순 없다. 저도 한때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좋은 선배, 지도자, 멘토를 만나 성장할 수 있었다. 재단 식구들도 좋은 선배들과 맺어주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Q 수원문화재단 최초의 민간 전문가. 기대가 크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달라.
A 문화재청 전문위원 12년, 서울시경기도문화재위원,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등을 하면서 배운 것이 많다. 무엇보다 균형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 조차 여러 장르에서 출발했고, 다양한 것들을 접해왔으니, 한 가지에 치우침이 없도록 할 것이다. 여기에 수원시가 지향하고 있는 부분이 전통을 자원으로 한 관광활성화다.
그 점에 있어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제가 올 수 있게 된 계기도 재단의 활성화를 위해 소신껏 책임 있게 노력해 달라는 뜻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두렵고 책임감도 느낀다. 갈 길은 멀고, 임기는 짧지만,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 할 것을 약속한다.
대담 = 이선호 문화부장
정리 = 송시연기자
사진 = 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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