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여덟에… 펜 대신 총 들고 조국 지켰다”

내일 6·25 발발 66주년… 참전용사 14人 한 자리에
입대 3일 만에 포로로 잡혀 강제노역 시달리고
맨손으로 땅굴 파다 폭탄에 열손가락 모두 잃기도
“지금의 청춘들, 그들의 고귀한 희생 잊지 말아야”

“펜 대신 총을 잡아야만 했던 그때, 우리 나이는 스무살에 불과했습니다”

 

6·25 한국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둔 23일 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경기도지부 성남지회 사무실에 국가 참전유공자 14명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노는 것이 마냥 좋았던 열여덟살, 열아홉살밖에 안됐는데 전쟁과 죽음이 무엇인지 어찌 알았겠느냐?”라며 “오직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있었을 뿐”이라고 당시의 참담한 경험에 대해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갔다.

 

유공자 국중인씨(85)는 “국군에 입대하던 당일, 홀어머니와 여러 어린 동생들과 함께한 마지막 아침 밥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처음으로 ‘밥알이 모래알 같다’는 말의 의미를 느꼈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법도 했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에 무덤덤히 그 자리를 참아냈다. 당시 내 나이 불과 열아홉살밖에 안 됐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나 자신이 기특했다”고 말했다.

 

이곳 14명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은 말로만 듣던 백마고지 전투, 원통 현리 전투, 오송산 전투 등 현장의 주인공들이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6·25 한국전쟁에 대해 이들은 마치 어제 일같이 생생히 떠올렸다.

 

한쪽에서 침묵을 지키던 한신석씨(86)는 “북한군의 포로로 붙잡혀 2년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입대한 지 3일도 안 돼 중공군에게 붙잡힌 한씨는 열아홉살의 나이에 평양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는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중공군이 총구를 머리에 겨눴다”며 “그러나 이상하게 무서운 감정이 들지 않더라. 총구를 겨눈 적군도 나와 같던 19살처럼 얼굴이 앳돼서였다.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씨의 포로 생활은 고됐다. 옆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는 맨손으로 땅굴을 파다 폭탄을 건드려 열 손가락 모두가 잘려나갔다.

 

한씨는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보급받은 소량의 강냉이를 알알이 세며 먹고 버텼다. 한겨울에는 영하 10도를 훌쩍 넘기는 지독한 추위가 계속해 이어졌다. 얼어 죽지 않고자 서로를 부둥켜안아야만 잠들 수 있었다.

 

그는 “스물한살이 돼서야 포로교환을 통해 남한으로 돌아왔다”며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어머님을 만났을 때 껴안은 채 목놓아 울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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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례하는 노병들 6·25 전쟁 발발 제66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성남시지회 소속 노병들이 “지난 날 목숨을 걸고 지켰던 우리 조국을 후손들이 꼭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달라”며 경례를 하고 있다. 김시범기자
옆에 있던 박종철씨(86)는 “연애나 학업에 정신없는 현재의 스무살들에게 이는 상상조차 못할 일들”이라며 “당시 나의 청춘을 다 바쳤고 지켰기에 지금 청춘들이 비극을 대물림받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기쁘다”고 소회를 밝혔다.

 

박씨는 스무살에 6·25 전쟁을 통틀어 국군이 대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던 이다.

 

그는 “전쟁이 나기 전 스무살의 나는 대학 진학 등 학업의 길을 가고 싶었다”며 “그러나 전쟁으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 자리에 있던 유공자들은 “꿈많던 나의 청춘은 6·25전쟁으로 모두 접혔다”며 “그러나 내 조국을 지켰다는 자부심에 후회는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들은 또 “당시 죽었던 스무살들의 청춘이 있기에 오늘이 있다”며 “지금의 청춘들이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조철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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