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옥시, 성준이, 그리고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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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에서 성준이를 보았다. 자기 몸무게의 절반도 넘는 산소통을 끌고 다니는 아이. 올해 열네 살이니, 원래대로라면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인데 여전히 초등학생이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병원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에 또래보다 늦어졌다.

 

성준이는, 그러니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다. 가습기 살균제 속에 포함된 독성물질로 인해 폐가 손상되었다. 2014년부터 올해 5월 말까지 성준이와 비슷한 피해를 보았다고 신고한 숫자가 2천336명에 달한다. 그 중 사망자는 462명이나 된다.

 

이 대형 참사의 중심에 영국계 다국적기업 옥시레킷벤키저가 있다. 영국까지 달려가 회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모습이 언론에도 종종 나왔다. 이쯤 되면 관련자 처벌이나 피해자 보상 등의 법적 절차가 벌써 이루어졌어야 옳다. 한데 어쩐 일인지 본격적인 수사가 미뤄졌다. 어영부영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피해자와 가족들의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제일 미웠던 게 누군지 아세요? 정부요? 제조사요? 아니요, 바로 저였어요.” 무심코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내 가슴에 성준이 어머니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 전까지는 솔직히 남의 문제려니 했다. 테러는 둘째 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자꾸만 죽음에 노출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성이 생기는 법이다. 남의 아픔과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진다. ‘나만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복불복 식 사고를 하게 된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모세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집트 왕자>라는 유명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노예였던 히브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 노예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딸을 낳으면 살려두고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은 집마다 통곡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딸을 낳은 집인들 멀쩡했겠나. 이 딸이 자라서 누구에게 시집을 간단 말인가. 이집트 왕이 히브리 딸들을 살려둔 저의는 분명하다. 말하자면 ‘근로정신대’나 ‘이집트군 위안부’ 등으로 이용할 심산이었다.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히브리 부모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제 속으로 낳은 딸이 국가권력에 의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심정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힐까. 대량학살의 땅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수치요 모욕이 아니었을까. 학살의 주체는 따로 있는데, 자기가 죽였다는 엄한 죄책감이 평생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지 않겠나.

 

모세가 극적으로 구출된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힘이 없어 짓밟힌 사람들의 한 맺힌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일강을 억울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채운 이집트 제국을 심판하시고, 히브리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기 위해 모세를 살리셨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고난 당하는 사람들 편이다.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운 좋게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의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살아있음을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불안사회’에 대한 분노가 더 클 테다. 안도감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건 오직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며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해 부단히 애쓸 때뿐이다.

그러니 분노할 것. 성준이와 그 가족의 고통을 외면한 기업과 정부와 검찰에 대해, 아니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랑할 것. 여전히 고통스럽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연약한 생명들을.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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