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정치인의 수염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기자페이지

제정 러시아의 절대군주였던 표트르 대제는 1699년 ‘수염세’를 도입했다. 유럽에 뒤진 러시아를 근대적 서구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귀족들은 슬라브인의 긴 수염은 하늘이 준 것이라며 세금을 내고 수염을 길렀지만, 세금내기 어려웠던 서민들은 쉽게 수염을 깎아 버렸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에도 수염은 터부시됐다. 1975년 국무회의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로마제국이 망한 것도 수염을 지나치게 기르는 등의 ‘이상 풍조’와 관련 있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대중매체는 수염을 기른 연예인의 출연을 금지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수염은 개성이자 취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정치인들은 ‘이미지메이킹’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수염과 허름한 옷차림은 하나의 정치코드가 됐다. ‘수염의 정치학’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고비를 맞았거나 중대 결심을 앞뒀을 때 국면전환이나 쇄신을 위해 수염을 기른다. 서민적 느낌을 주려고 활용하기도 한다.

 

손학규 전 민주당 고문은 2006년 6월 30일 경기지사에서 퇴임한 후 ‘100일 민심 대장정’에 나섰다. 당시 광부ㆍ용접공ㆍ농부ㆍ염색공ㆍ지게차 운전사 등 93개의 직업을 체험하며 수염을 깎지 않은 채 전국을 누볐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현 시장도 선거를 앞두고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덥수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철수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는 기자회견장에서였다. 이때 5%대이던 지지율이 40% 이상으로 올랐다.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도 해양수산부 장관 때인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나자 수염을 깎지 않고 130여 일간 사고 현장을 지켰다. 그의 수염은 참회, 사죄의 의미로도 해석됐지만 한편에선 아무것도 않고 수염만 길렀다는 비판도 나왔다.

 

대선이 1년 4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정치인의 수염이 또 등장했다. 여권 대권주자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최근 7박 8일간 전국 민생투어를 하며 수염을 깎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야권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수염을 길렀다. 4·13 총선 이후 6월부터 한 달여간 네팔과 부탄에 머무는 동안 면도하지 않은 모습이 공개됐다.

 

국민들은 정치인의 수염에 별 관심이 없다. ‘서민행보’ 내지 ‘고뇌’ 보다는 ‘쇼맨십’이란 생각을 한다. 국민들이 바라는 건 수염이라는 허상보다는 진정성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