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한진해운 마지막 5일, 정부는 없었다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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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는다. 망한 날짜가 어느 하루로 기록될 뿐이다. 한진해운도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았다. 망한 날짜가 8월 30일로 기록될 뿐이다. 그래도 자의적으로나마 마지막 5일에 의미를 둬 보자. D-5일은 8월 25일이다. 한진해운이 마지막 자구안을 제출한 날이다. D-0일은 8월 30일이다. 한진해운 주식이 장중 거래 정지된 날이다. 이런 억지 획정이라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 대기업의 마지막 5일과 그 5일간 보여준 정부 모습 때문이다.

8월 25일 하루는 한진에게 더없이 길었을 날이다. 회생을 위한 마지막 자구안의 제출 시한이었다. 업무가 끝나갈 무렵 한진의 자구안이 산업은행에 도착했다. 산은은 한진해운 채권단 중 66%를 차지하는 주(主)채권은행이다. 경제부 기자들의 관심이 산은을 향했고, 반응이 흘러나오는 데는 두어 시간이면 족했다. 한 마디로 ‘턱도 없다’였다. 1조2천억원이 필요한데 자구안은 5천억원 언저리였다. 이때부터 ‘한진해운’ 연관 검색어에 ‘법정관리’가 붙기 시작했다.

그날, 정부는 온종일 침묵했다.

8월 26일. 자구안에 대한 입장을 산은이 공식 발표했다. 정용석 산은 구조조정본부 부행장이 직접 나섰다. “사실상 자구안 가운데 실효성이 있는 지원은 4천억 원뿐이다.” 또 다른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사실상 조 회장이나 그룹 측이 한진해운을 더 이상 지원하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라고까지 말했다. 채권시장에서 한진해운 가치가 곤두박질 쳤다. ‘내주 채권단 회의에서 최종 결정 내겠다’는 일정이 구체화됐다. 법정관리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그날도 정부는 온종일 침묵했다.

8월 29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주말 이틀이 흐른 월요일이다. 주말에 응축됐던 시민과 업계의 불안이 터져 나왔다. 부산 지역 시민단체들이 ‘한진해운을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선주협회도 한진해운 법정관리는 피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한진해운도 마지막 수를 던졌다. 나흘 전 자구안의 수정안을 냈다. 증자일정을 구체화하는 안이었다. 하지만, 산은은 냉담했다. 이동걸 회장의 ‘구조조정 가치도 중요하다’는 한 마디가 업계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날도 정부는 아무 입장이 없었다.

운명의 8월 30일이다. 밤사이 바뀐 분위기가 전해졌다. 채권자인 KEB 하나은행이 한진 구제안에 조건부로 동의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현대상선과의 합병 얘기도 흘러나왔다. 오전 11시 예정인 채권자 회의를 앞두곤 한진해운 주식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은의 입장은 강경했다. 이동걸 회장이 “내가 보기에는 부족하다”며 다시 한번 파국을 예고했다. 결국, 오후로 들어설 때쯤 자구안은 부결됐다. 곧이어 증권거래소가 한진해운 주식을 정지시켰다.

이날,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이 비로소 나왔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채권단 결정은 자구노력의 충실성, 경영정상화 가능성, 해운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논의해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한진해운 주식 거래가 중지된 몇 분 뒤였다. 그런데 말의 맺음이 굳이 제3자 논법이다. “판단했다”가 아니라 “판단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은행들의 결정을 지켜만 봤을 뿐이라는 표현이다. 한진해운은 은행들이 퇴출시켰고, 정부는 이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싶어 보이는 표현이다.

한진해운이 망했다. 과연 망할만 했는가. ‘땅콩 회항’과 ‘재산 밀반출’로 얼룩진 총수 일가의 부도덕이 빚은 자업자득인가.

이 토론은 시간을 두고 이어질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현재-대기업이 망하고 24시간이 흐른- 논제가 있다. 정부의 5일간 침묵이다. 국적선사 국내 1위 기업이다. 세계 7위 해운사다.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책임진 운송사다. 세계 각국의 30여개 법인과 200여개 지점을 갖고 있는 대기업이다. 이 대기업이 망해가는 5일이었다. 그런데 이 긴박한 순간에 정부는 빠져 있었다. 은행 관계자의 말이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업계 1위 대기업의 정리 모습으로 격에 맞는 것인가.

그 5일. 이런 분석을 내놓은 보도가 있었다. -정부가 야당의 서별관 청문회를 부담스러워 한다. 안 그래도 대우조선 특혜 논란이 발목을 잡고 있다. 한진해운 지원까지 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는 빠져 있고 은행이 앞장서 악역을 할 것이다. 결국, 한진해운은 법정관리로 갈 것이다. - 많은 이들이 ‘아니겠지’라고 여겼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한진해운은 정확히 그 시나리오를 따라 업계에서 사라졌다. 이게 우연인가.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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