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인천’ 글로벌 도시 비상] 한눈에 보는 발전사
부여에서 건너온 비류왕 세력 바닷가 터전… ‘미추홀’ 명칭 탄생
조선 태종 13년 ‘인천’ 지명 사용… 19세기 개항이후 국제도시화
백제 초기 비류왕 세력이 부여에서 건너와 바닷가에 나라를 세우면서 최초 ‘미추홀’ 명칭을 가진 인천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이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475년) 때로 인천은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불렸다.
신라 경덕왕은 소성(邵城)으로 고쳐 불렀다. 고려 숙종 때에 경원군(慶源府)으로, 공양왕 2년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됐다. 경원부는 1392년(공양왕 2)에 경기도를 확장하고 좌도와 우도로 도를 나눌 때, 양광도(楊廣道)에서 경기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고 나서는 경원부는 1392년(태조 원년)에 인주가 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지방 제도 개편과 함께 군이나 현에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주 자 대신 ‘산(山)’ 자나 ‘천(川)’ 자로 고치게 하였기 때문에 인천군으로 개칭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시민의 날인 10월 15일은 바로 이때 당시 인천으로 명명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인천군은 1460년(세조 6)에 이르러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인천은 문학산, 계양산, 소래산을 사이에 두고 영종,용유도에 해양군사방어 기지를 가진 지방도호부로 존속됐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의 해상출입구인 인천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가 강화도를 중심으로 인천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이를 반영한다.
열강의 무력에 굴복한 조선은 인천항을 개항했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이들의 한반도 진출을 가능한 한 개항장에 국한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제물포에 인천해관과 각국 영사관은 물론 상공업시설, 종교, 교육, 문화시설이 빠르게 설립되면서 인천은 점차 국제적 도시사회로 변모했다.
반면 인천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최전선이다보니 도시는 빠르게 피폐했다. 타 지역보다 많은 토지와 인력이 수탈당했고 도시 행정조직도 빠르게 일본식으로 변해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가 파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1945년 광복, 1950년 6·25전쟁를 거쳐 1960년대 정부 주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인천의 본격 성장이 기지개를 켰다. 수출위주 정부정책에 따라 공업시설이 잇따라 들어서며 당시 서울, 부산, 대구에 이은 국내 4대도시로 성장한 인천은, 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2013년 국내 1호 경제자유구역 지정의 호재에 힘입어 개항기 제물포와는 완전히 다른, 인구 300만명을 자랑하는 국제도시로 고속 성장하고 있다.
양광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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