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 “나는 용감한 푸른 용”… 영혼 담은 ‘따발총 보이스’
팝콘 한 그릇 가득 튀겨놓고 배 깔고 누워 보는 애니메이션 속 성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내는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신비로웠다. 한편으론 까짓 해야 흉내 내는 일이 뭐가 어려울 성싶어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이야기를 알아들을 만큼 자라자 다양한 ‘소리’에 눈을 빛내며 물개박수를 보냈다. 그래서 때론 돈키호테가 되어 악당을 물리치며 고함을 치고, 인어공주가 되어 물거품으로 사라지며 왕자를 그리워하기도, 오누이가 돼 어흥 사자가 쫓아오는 긴박함을 제스처와 함께 처리해야 했다. 그야말로 내 아이를 위한 맞춤형 ‘聲優’가 된 것.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의 상상력의 키(key)를 갖고 있다. 부모가 노력하는 만큼 아이들의 키는 한 뼘씩 자란다. 특히 상상력의 시발점인 스토리텔링은 잘하든 못하든 부모의 역할이고, 할수록 욕심 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일일체험에 주저 없이 애니메이션 더빙을 주제로 성우에 도전했다. 때마침 수원청소년육성재단(이사장 김영규) 산하 수원영상미디어센터(센터장 김노경)에서 지난 15일 ‘가족과 함께하는 만화더빙’ 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에 선뜻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실 성우역할을 기대하고 갔지만 발성·호흡연습부터 해야한다는 루아(김은경·클엔터테인먼트 연기 강사) 성우 강사(30)의 설명엔 갸우뚱했다. “하체는 어깨너비로 벌려 고정하고 상체는 자유롭게 해줘야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자 모두 일어서서 <아, 에, 이, 오, 우>를 따라하세요”
이날 강좌에 참가한 인원은 총 10여 명.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뽑기엔 민망했지만, 루아 강사의 오더대로 주뼛거리며 일어선 기자와 가족 수강생들은 엉덩이에 힘을 주고 배를 누르며 발성연습에 몰두했다.
다음은 문장연습. “중앙청 창살은 쌍창살이고, 시청의 창살은 외창살이다”는 눈으로는 한 문장이었지만 강약에 리듬까지 살려야한다는 강사의 주문대로 안 되고 꼬이기만 했다.
루아 강사는 시종일관 자신감과 배포를 주문했다. “힘없이 작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유쾌하지 않아요. 특히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살아숨쉬는 인물로서 감정을 최대한 이입하려면 적극적이고 당찬 보이스가 필요합니다”
10명의 가족 수강생은 이날 3팀으로 나눠 미국 Disney Channel의 TV만화 ‘꼬마의사 맥스터핀스(Doc McStuffins)’의 사랑스러운 캐릭터인 닥 맥스터핀스, 핼리, 래미, 스터피, 칠리, 브론티, 후치 역할을 각각 맡았다.
꼬마의사 맥스터핀스는 아프거나 고장 난 장난감을 전문으로 치료해주는 꼬마의사와 주위의 장난감 캐릭터의 일상을 그린 TV만화다.
기자는 평소 발랄·경쾌한 보이스이기에 주저 없이 꼬마 공룡이자 악동 이미지의 스터피를 맡았다. 이날 강의에 함께한 초등·중등 학생들도 엄마·아빠와 상의를 하며 캐릭터를 분석하고 자신이 소화할 역할을 두루 살폈다.
이어 영상으로 캐릭터를 분석하며 자신의 역할을 체크하는 등장인물 분석시간이 됐다. 연기할 장면은 <#37-1:납작해진 교수님(professor pancake)>. 영어 원어로 전개되는 장면은 귀엽고 아기자기했다. 솜뭉치를 들고 7명의 캐릭터가 눈싸움하는 씬에 이어 후치라는 부엉이 교수님이 장난감 상자에 깔려 납작해져 치료하는 장면이 외울 새도 없이 쓱쓱 지나쳤다.
■ 리딩 연습 반복했건만… 본녹음 ‘실수 연발’
기자는 자신감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건만. 막상 스튜디오 녹음실 안 마이크 앞에 서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사각형 문으로 루아 강사가 큐사인을 보내면 영상이 화면을 통해 나오고 곧바로 녹음이다.
“용감한 푸른 용은 캠핑을 좋아하지. 방에서 해도 캠핑은 캠핑이니까”. 연기의 처음을 맡은 기자는 마이크에 숨을 불어넣으며 스터피가 되려 노력했지만 결국 스크린엔 스터피 대신 칠리가 등장했다. 순식간에 대사를 놓친 것.
이어 마이크 불이 꺼지고 “다시 갈게요”라는 루아 강사의 말만 메아리쳤다. 다른 수강생의 눈치를 받으며 이어진 녹음. 이번엔 무사히 넘어갔지만, 긴장을 곧추세우며 10여 회의 대사를 무사히 끝냈다. 등줄기에 땀이 찬 것도 그때야 알았다.
프리랜서로 더빙·방송연기 등 10여 년 넘게 각종 방송 분야서 활약 중인 루아씨(성우 강사)는 “2년여 정도 수원청소년영상미디어센터와 인연을 맺고 유아·가족 단위 더빙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참가 가족을 점수로 주자면 상·중·하의 ‘중’을 드립니다”고 평가했다.
보통 성(性)과 나이를 불문하고 캐릭터를 넘나들며 적극성을 높게 평가하지만 오늘 팀은 아무래도 취재 때문인지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기자는 어떤 점수를 받을까? 똑같이 ‘중’. 처음에는 캐릭터 분석에서 약간 헷갈렸지만, 회차를 거듭하며 안정적으로 잡아갔다는 점.
그리고 마이크에 대한 겁이 없고 시원하게 뱉는다는 점에선 후한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캐릭터를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연기를 놓친 점, 타 배역과 이중 돼 동시녹음 된 점에선 마이너스를 얻었다.
부인과 두 딸과 함께 더빙체험에 나선 김진현씨(수원 권선동)는 “이 친구(부인)가 미디어센터서 강의를 들어요. 그러다 보니 자주 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는데 이번 만화더빙 체험이 있다기에 초등 3년·5년생 딸들과 함께 듣기로 했죠. 아이들이 평소 하기 어려운 체험을 경험한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실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체험은 어른인 저와 와이프도 성우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하지만 같은 씬의 역할만 바꾸다 보니 지루한 점도 있어요. 다음엔 겨울왕국·짱구는못말려 등 저작권 관여 여부를 떠나 대중적인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에 온 가족이 함께 도전하고 싶습니다”고 웃음을 띄었다.
소리는 많은 것을 전달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소리 중에 가장 듣고 싶고 행복한 목소리는 바로 엄마·아빠의 목소리다. 아이들을 위해 오늘도 돈키호테·인어공주·콩쥐 팥쥐가 되어 연기력을 검증받는 모든 부모의 목소리에 응원을 보내며 일일 전문 성우체험을 마쳤다. 영상미디어센터를 나서며 체험 내내 애착을 느낀 스터피 목소리로 아이에게 들려줄 동화 이야기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향했다.
권소영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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