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딱 이맘 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진행한 김윤경숙 작가의 ‘The Isle of Jaehang_Ubiquity’라는 전시를 보러 갔었죠. 작가는 주 전시실에 ‘항상 존재하는 섬’을 설치해 놓았던군요.
어떤 사건의 체험과 생체권력의 이미지가 사회화의 언어로 구조화 된 것이 아마도 그의 전시공간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섬’의 구조는 18세기 영국의 제레미 벤담이 제안했던 학교, 공장, 병원, 감옥의 구조를 닮았었거든요. 소수 권력에 의한 감시체계로서의 판옵티콘(Panoption)이죠.
푸코는 컴퓨터의 통신망과 데이터베이스를 그것에 비유했고, 실제로 우리는 정보기술로 구축된 감시체계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빨간 테이프로 전시공간을 위아래 구분한 뒤 그 가운데에 아시바 구조의 전망대를 둔 공간연출을 보세요. 그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아시바 위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벽에 붙인 오브제 작품을 읽거나 보도록 했어요. 테이프의 위 경계지를 따라 쓰거나 붙여놓은 글과 그림들이 있었죠.
사실 이 구조는 판옵티콘의 감시체계를 닮긴 했으나 감시자의 시선을 관람객에게 둠으로써 권력의 구조를 뒤바꿔놓는 아이러니가 있어요. 이 작품에서 감시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거든요.
직접 벽에 쓰거나 혹은 붙여놓은 글과 그림들은 그가 보았고 읽었고 알았던 생체권력의 파편들이었어요. 역설적이게도 그는 권력의 파편들을 박제하듯 붙여 놓고 시민을 전망대 위에 세워 놓았어요. 그런데도 저는 이 미묘한 권력의 재편이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불편함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더군요.
전망대는 전면화 된 빨간 테이프의 표면위에 부유하듯 떠 있어서 그 아래를 살필 수 없었어요. 살필 수 없어서 ‘시민’은 철저히 홀로 주체로 남지요. 그렇다면 전망대 아래의 붉은 방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는 ‘항상 존재하는 섬’이라 했어요.
그의 작품의 구조를 의미 짓기 하면, 아래가 생체권력이 작동하는 통제사회이고 위가 비가시적 존재로 살아가는 권력일 거예요. 섬은 둘을 균형 잡기 하거나 균형이 불균형으로 변질될 때 작동하는 시민 권력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사회화의 언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화’ 될 수밖에 없는 듯이 보여요. 이때 개인화는 이 작품에 참여한 모든 ‘나’를 말하죠. 시민 그리고 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V는 “신념은 총알로 뚫지 못하지!”라고 외치고, 여주인공 이비는 V를 “에드먼드 단테였죠. 그리고 내 아버지고 내 어머니며, 내 오빠 내 친구였죠. 그는 당신이었고 저이기도 해요. 그는 우리 모두였어요.”라고 절규했죠.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시민과 나’의 의미가 이비의 절규와 겹치더군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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