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덩그러니… 누가 언제 왜? 미스터리 품은 작은 토성
■ 오늘날과 다른 척박한 평택현
토요일 아침 평택으로 가는 길에 비가 조금씩 내렸다. 오성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평택시에 들어서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안개가 피어올라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농성으로 가기 전에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릴 겸 먼저 용성리성지(경기도 기념물 제205)를 들렀다.
2003년에 이뤄진 농성의 지표조사 및 발굴 결과 농성과 비슷한 시기에 쌓은 성곽 중 하나로 지목된 곳이 용성리성지였다. 또 용성리는 평택시에서도 여러 성곽들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농성으로 가기 전에 지형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용성리성지를 보고나서 읍지에서 미리 봐둔 농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팽성읍의 농성까지 자동차로 30분 정도 걸렸는데 가는 길에 농성과 연관이 깊은 안성천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평택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평택현은 연산군 시절에 경기에 속한 적도 있으나 안성천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에 속했다. 조선전기에 시인으로 명성이 높던 서거정은 “한 언덕 약간 높게 사방이 편평한데 / 저물녘 돌아와 외로운 정자에 올라보니 / 땅은 바다와 가까워 생선 게가 풍부하고 / 들엔 이미 가을 깊어 벼농사로 가득찼네”하고 평택을 노래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택현은 오늘날 팽성읍을 기반으로 한 작고 척박한 고을이었다. 고을이 너무 작아 고을 뒤에 있는 주산에 올라 사람들을 부르면 모두 모였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전하고 있다. 또 주변이 퍽퍽한 황무지인데다가 관개도 잘 되지 않아 조금이라도 한재를 만나면 그해 농사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홍수가 나면 평야여서 물이 고이기 일쑤였다. 만약 이곳에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자부심마저 없었다면 평택민들의 삶은 더 팍팍했을 것이다.
농성은 안성천이 서해로 흘러가는 하구의 구릉에 쌓은 토성으로 해발 24m의 낮은 구릉에다 남북이 긴 직사각형 모양을 띠고 있다.
둘레와 길이는 지난 2003년의 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제시하면 전체 둘레는 337m, 남북길이는 134m, 동서길이는 96m다. 토성 내부의 면적은 5천984㎡이며 외벽선 기준 면적은 1만1천312㎡이다. 외벽의 높이는 대략 5~8m다. 동ㆍ서쪽에 성문터가 있으며 현재 동쪽 성문터 쪽으로 출입구가 나있다.
규모가 워낙 작아서 농성을 천천히 한 바퀴 걷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된다. 성터 내부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며 20여 년 전에는 밭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외황도 두었으며, 바깥이 저지대 습지여서 자연적인 해자도 나름대로 형성돼 있는 당당한 토성이다.
■ 농성은 언제 쌓았을까.
농성에 올라서면 낮은 구릉이지만 주변에 산이 없는 탓인지 사방을 멀리까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성곽을 언제, 무슨 목적으로 쌓았는지 궁금해진다. 또 조선시대 문헌이나 지도에는 ‘토성’으로 기록돼 있는데 언제부터 ‘농성’으로 불리게 됐는지도 의문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년)에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며 토성을 축조했고 농성이라는 이름도 그 때 생겼다고 했다. 아마도 오늘날 이 자료를 근거로 해 농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은데, 일제가 농성을 임진왜란기 일본군과 연결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다분하다.
현재 농성을 축성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전 시기에 걸쳐 있다. 삼국시대 축성설은 김해식 토기 조각이 발굴된 것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통일신라 축성설은 임(林)씨의 시조인 임팔급과 연결 짓고 있다.
현재 농성 공원 안에 임팔급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이 설을 신빙성있게 보는 것 같다. 그런데 2003년에 동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 및 발굴조사에서는 삼국이나 통일신라로 볼 수 있는 유물이 없다고 진단했다.
그보다는 고려청자 및 분청사기 조각 등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의 유물들이 다수 발굴됐다. 이를 근거로 하면 농성의 축성 시기는 고려시대 축성설이 가장 유력하게 된다. 또 농성의 축성 방식이나 출토 유물이 앞서 소개한 용성리성지나 덕목리성과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용성리성지는 왜구가 극심하던 고려 공민왕 때에 용성현 치소인 비파산성으로 진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용성리성 역시 평지에다 장방형으로 쌓은 토성이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농성이 고려시대에 아산만 일대와 연결한 해안 방어나 고려 말 왜구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농성에는 청야전술을 펼치기 위한 식수 시설이 없으며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치성도 없다. 이 점은 농성이 장기간 들어가 있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다. 오히려 이곳에 몰려있으면 성벽 높이가 낮은 데다 퇴로마저 없어 함락될 위험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이 여전히 농성을 둘러싼 의문이다. 그래서 이 성은 적침을 살피는 조망성이었을 가능성도 타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성에서 출토된 유물로만 보았을 때에 농성이 고려시대 이후로 축성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높다. 하지만 이것이 농성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출토 유물과 상관없이 지역에서 전승되고 남겨진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평택현 지도’(1872년 지방 지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임진왜란 때에 백성들이 쌓았다”고 돼 있다. 또 『팽성지』에는 “옛일을 잘 아는 어르신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삼국 전쟁 때에 서로 약탈을 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매번 추수가 끝난 후에 곡물을 모아서 그곳에 저장해두었다고 한다. 또는 신이한 승려 도선이 진(鎭)의 지맥을 위해 이곳에 성을 처음 쌓았다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기록상 농성이 ‘토성’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후기다. 조선전기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농성은 축조 주체가 농민을 포함한 일반 백성이며 승려 도선까지 등장한다. 삼국 전쟁이나 임진왜란 등 전쟁에 맞선 지역민들이 부각되고 있으며 민간에 인기가 높던 풍수설까지 동원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평택 지역에서 농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지역민들과 연결되어 유통된 것은 농성이 지역민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오늘날 경기도에는 약 230여 개의 성곽이 분포돼 있다. 이들 중에는 이름만 남아있는 채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성곽들도 있다. 필자가 지난번에 소개한 남양주시 마진산성도 그 중 하나다. 평택현에 조성된 이 조그마한 토성의 역사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으며 조선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토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을 수호하는 존재로 부각되어 오늘날까지 잘 남아있게 됐다.
앞으로 농성의 의문이 풀리고 또 어떤 이야기들이 덧붙여질지 모르지만 이 토성이 오래오래 후세에 전해져 평택의 역사, 한반도의 역사를 밝히는 등대로 남아있기를 바래본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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