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주만참의부 조직해 독립운동 헌신
부모의 이혼으로 상심하여 14세 때 입산했다. 3년 동안 중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간청으로 하산했다.
1923년 상해로 건너가 사관학교를 마치고 만주에 가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했다. 다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6년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 황해도 평산의 김상렬·함성호 등에게 군자금을 요청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경했다. 그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9월 7일 유택수와 함께 은행 습격을 모의하고 안성에 도착했지만 거사를 하지 못하고 부호 박승륙의 집에 가서 600원을 강탈하고 이천으로 피신했다.
그해 10월 21일 단독으로 이천군 식산회사(殖産會社)를 습격하려다 주재소가 옆에 있음을 보고 먼저 주재소를 습격했다. 수원에 은신하다가 유택수와 함께 상경해 전당포를 습격했다.
아버지가 죽자 수원에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이천으로 갔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5월 사형이 언도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1984년 이천읍에 동상이 건립됐다. 이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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