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종교] 빛과 소금? 소금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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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주변 세계를 정화하여 뭇 생명에게 살맛을 더해주는 삶, 모름지기 예수 제자라면 그렇게들 살 테지. 세상을 이롭게 하며 말이다. 그것이 제자다움이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등불을 켜고 어둠을 가시는 삶, 무릇 종교라면 그래야겠지. 세상을 환히 밝히는 종교 말이다. 그것이 또한 교회다움이리라.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삶!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가.

 

그런데 왜 굳이 ‘소금’과 ‘빛’일까? 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일까? 정작 많은 사람들이 ‘빛과 소금’으로 기억하고, 기독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투로 새기는 까닭은 무얼까? 그래서 묻는다. 나는 빛이고 싶은가, 소금이고 싶은가? 하나를 꼽는다면 어느 쪽인가? 질문해놓고 보니 빛이 주는 느낌과 소금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경험에 따르자면, 많은 기독인들이 소금보다는 빛을 선호한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기보다 세상의 빛이고자 한다.

 

빛은 자신을 드러내며 어둠을 물리친다. 확실히 빛이 주는 이미지는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성과 전투성, 심지어 배타성마저 띤다. 빛은 말 그대로 빛이 난다. 반면에 소금은 드러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오롯이 내놓는다. 자취를 남기려 들지 않고 외려 자신을 없이함으로써 맛을 더한다. 그래서 소금의 이미지에서는 수용과 포용, 희생이 묻어난다. 녹아 없어지면서 남을 돕는 것이 소금 아니던가. 이런 탓인지 교회는 대개 세상의 소금이기보다는 빛이 되고자 하였고, 빛이라 자만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소금을 뺀 빛의 이미지가 자칫 종교를 자폐와 독선에 사로잡힌 무서운 권력집단으로 내몰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진대, 빛을 자임하고 나선 교회는 이교(異敎)라는 어둠을 몰아낸다는 핑계로 순교자에서 박해자로 돌변하였고, 십자가의 희생정신을 십자군의 정복정신으로 바꿔치고 말았다. 스스로 빛이라고 자만하는 종교, 소금이기를 마다하고 오로지 빛이 되려던 교회가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는 ‘소금’과 ‘빛’을 이야기한다. 빛의 은유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빛의 이미지, 그 한쪽만을 보고서 독선과 배타의 자폐집단으로 떨어질 것을 헤아려 소금을 말씀하셨을 테다. 스스로 빛이고자 하는 오만, 맘대로 빛과 어둠을 가르는 독선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소금과 빛의 다름이 자아내는 긴장을 통해 아무런 편벽됨 없이 곧추서도록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소금과 빛’을 이야기했나 보다. 종교가 종교답고,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먼저 소금이어야 한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없이함으로써 세상을 밝히고 살맛을 더하자고 말이다.

 

어디 종교뿐일까. 정치가 그러하고 일상이 또한 그러할 테다. 빛이 되겠다는, 내가 빛이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네들 빛에 홀려 되레 어둠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것이 우리네 역사 아니던가. 그러니 함부로 추앙하지도, 어벙하게 속지도 말지니, 세상을 이로이 하는 소금으로 살았는지 그 내력부터 곰곰이 톺아볼 일이다. 저마다 소금으로 살고, 죽어, 어둔 곳에도 살맛이 생겨난다면 우리네 삶은 얼마나 환하고 포근할까.

 

박규환 숭실대 기독교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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