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실종된 겨울이라고 하니 화가 난 동(冬)장군이 모처럼 대한(大寒)이라는 시절에 맞추어 설맞이 행사를 하고 있다.
이 추위가 풀리면서 곧 음력 정유년이 시작된다. 바로 닭띠 해이다. 그런데 어릴 적에 이즈음이 되면 아무리 추워도 설맞이 준비로 온 동네가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는데 요즈음에는 설이 실종되어가는 지 그저 조용하다.
물론 세상이 바뀌어 과거의 명절보다도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는 신조 명절이 나타나서 백화점의 문간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등등 과거에 듣도 보지도 못한 서양식 또는 어설픈 신한류명절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문화융성이라고 하면 가졌던 문화를 우선 잘 가꾸고 더 발전시키는 토대 위에서 새로운 문화가 쌓여서 더욱 두텁게 형성하여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뿌리가 죽어가고 또 뿌리가 없는 문화가 얼마나 자랄 것인가?
얼마 전 구석기유적을 조사하기 위해서 여행을 갔던 베트남의 설 준비를 보면서 어릴 적의 흥분된 그 시간의 추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도 하노이의 거리의 곳곳에 노란 작은 과일이 촘촘히 달린 만다린 나무를 작은 오토바이 뒤에 싣고 집으로 가고 그리고 가게나 큰 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큼직한 홍매화분으로 장식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며 훈훈하고 흐믓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모두 집안의 행복을 새해에 기원하는 하나의 의식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그 명절에 부자나 가난한 자 누구나 같이 즐기고 생각이 같음을 그리고 같은 시간 속에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보여주는 의식인 셈이다.
베트남의 시골로 여행을 가면서도 곳곳에 만다린 나무와 홍매를 파는 가게가 줄을 잇고 있었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실린 만다린 나무를 수도 없이 보았다. 가족의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이 거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고 나에게는 어릴 적에 설 대목에 어머니가 시장 다녀와서 풀어놓던 그 설빔의 추억이 떠오르는 시간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일 년 내내 매월 두 개의 크고 작은 축제를 두는 것이 정말 현명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축제마다 각기 계절에 맞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두어 사람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회적인 유대강화나 경제적인 행위가 바로 그 문화의 체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만든 그 현명함이 그 속에 있다. 그 세시풍속에서 나오는 일 년 축제의 시작이 바로 설이다. 요즈음은 세태 때문인지 그저 조용하다.
세상이 바뀌었다. 속도가 빠르기도 하고 정확한 점에서 기계적이기도 하고 또한 앞으로는 사람과의 교류가 기계를 통해서 그리고 개인 스스로의 사소한 욕구도 기계가 알아서 해 주는 인공지능, AI, 세상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의 문명이 물리적 공간의 개인화였지만 현대에는 사고나 경제행위조차도 개인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혼’이라는 말이 ‘섞이다’라는 뜻 뜻의 접두어로 사용되던 시절에서 이제는 ‘홀로’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혼밥, 혼여, 혼술 ...등의 행위가 점차로 대세를 이룬다. 어쩌면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의 관계는 이제는 차가운 디지털 기계 속에서 찾는 시대가 되어가는 셈이다.
이러한 행동들이 지금은 병처럼 보이지 않지만 관계를 단절해가는 인간사회가 미래를 장담할 수가 없다. 필요이상의 사회적인 관계가 메말라가는 세상에서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AI시대에 깊어 가면 갈수록 사회적 관계의 증진, 바로 이것이 오늘날 문화융성의 화두가 되어야 하고 또한 경제행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과거 미국 북서인디언 사회에서도 사회를 돌아가기 위해서 개인의 경계를 허물고 필요 이상의 소비를 촉진하는 축제가 열린다.
바로 현대미국사회에서는 범죄로 생각되기도 하였던 ‘포틀래치’라는 부자의 재산 사회적 나누기 또는 소비하기 축제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현명한 세시풍속들의 심오한 원리를 토대로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는 세시문화를 현대적으로 확장하여 가는 것이 바로 경제가 융성해지는 길이다.
이번 설에는 그저 내 마음의 고향인 연천 전곡유적지의 겨울여행축제에서 얼음지치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로 명절날 허전함을 달래기나 하여야겠다.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아태지역 국제박물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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