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島山의 쾌재정 연설 “이 나라의 주인은?”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heohy@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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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의 한 젊은이가 대동강변 정자에 올라 주위에 모인 군중을 향해 힘차게 외친다. “묻노니 이 나라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이 정자가 아직 남아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 병합을 노리던 무렵이었다. 

이 정자의 이름은 ‘쾌재정(快哉亭)’이고 청년의 이름은 도산(島山) 안창호였다. 이 연설에 명칭을 붙인다면 ‘쾌재정 연설’일 터이다. 반어적인 수사였겠지만,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했던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하늘 같은 희망을 불어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상 유례가 없었던 세계대전이 2차례나 예고된 격동의 20세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청년은 이듬해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난다. 교육학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 남부의 낯선 도시에 도착한 뒤 처음 목격한 건 조선인 인삼 장사치들의 싸움이었다. 이들은 서로 상투를 거머쥐고 “왜 남의 영역을 침범했느냐”며 악다구니를 쳤고, 미국인들은 이를 호기심 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공부가 아니구나.” 그는 이때부터 동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때아닌 청소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사람들의 거주지는 미국인들의 화장실보다 더 지저분했다. 청년의 독립운동은 동포들의 집 청소로 시작됐다. 

▶청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한 뒤 야학을 개설, 동포들을 교육하고 ‘공립신보’를 발행, 교포들의 생활 향상과 의식 계몽에 힘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한 건 지난 1913년이었다. 3ㆍ1운동 직후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한다. 어느덧 1930년대로 접어들었고,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서울로 송환돼 실형을 받고 복역한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수감 중 이듬해 3월 순국한다. 80년 전 오늘의 일이다.

▶도산 선생의 치열한 독립투쟁은 지순한 ‘나라 사랑’이었다. 지금도 숱한 인파가 길거리에서 ‘애국’을 외치고 있지만, 도산 선생과는 비견될 순 없을 터이다.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영달은 물론, 가족도 포기하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우국지사가 그랬듯, 도산 선생도 교언명색(巧言名色) 보다는 온몸을 던지는 희생으로 조국을 사랑했다. 도산 선생이 실의에 빠진 오늘날의 청년들 앞에 선다면 과연 어떤 말씀을 던지실까. “낙심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는 말씀이 오버랩되는 요즘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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