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이고, 본관은 풍산이다. 홍봉한은 성균관 진사 시절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노론 계열의 신진으로 활동하였다.
1743년(영조 19) 11월 13일 딸이 세자빈(즉 사도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국왕으로부터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는 홍봉한의 고속 승진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1744년 8월 19일 정9품 세자익위사 세마에서 6품으로 일약 승진하였고, 같은 해 10월 19일 정시(庭試)에서 급제하였다. 홍봉한의 급제는 다분히 영조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홍봉한은 급제 이후 승정원 가주서를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정5품 문학에 제수되었다가 약 5개월여가 지난 1745년(영조 21) 4월에는 종2품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었다. 급제 후 1년도 안된 시점에서 종2품에 오른 파격적인 인사이었다.
이에 대해 “이력이 없는데도 갑자기 탁용(擢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영조의 의지를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약 5개월 후에는 국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 승지를 지낸 이후에 홍봉한은 공홍도 감사와 성균관 대사성, 경기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9년(영조 25) 1월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면서 외척 홍봉한의 정치적 역할이 더욱 중시되었다. 홍봉한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혜경궁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아버지께서 과공홍도거에 급제하신 다음, 영조의 아끼심이 점점 높고 중해 벼슬을 차차 높이 올리시어 나라의 재정과 병권을 모두 맡기시니라. 아버지께서는 지극히 공평하신 마음과 정성으로 또 빼어난 지식과 재주로 일마다 임금의 뜻에 맞고 가지가지가 규범에 어긋남이 없었으니라. 또한 이십여 년을 장수와 재상으로 계시며 백성의 이해와 온 나라의 고락을 당신 일같이 아시어 안팎의 여러 폐단을 바로 잡아 지금까지 지켜지게 하시니라”「한중록」
실제로 홍봉한은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 군영대장직으로 어영대장과 총융사를 지냈고, 호조 참판을 비롯해 한성부 좌윤, 예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균역청당상과 선혜청당상 등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 관련 정책 운영에도 참여하였다.
영조 30년대 이후 세자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홍봉한은 정치 세력의 한 축인 북당(北黨)의 영수로 활동하면서 경주 김씨 김구주(金龜柱) 등이 주축인 남당(南黨)과 대립하였다. 사도세자가 화를 당한 임오화변 이후 홍봉한의 책임 문제가 논란이 있었으나 영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본인은 대신을 지냈고 가문 구성원들은 6조의 판서나 언관직 등을 장악했다.
정조 즉위 후 동생 홍인한이 역적으로 처단된 뒤 홍봉한에 대한 처벌 논의가 제기되었으나 정조가 양인을 분리하여 보호하려는 배려로 무사하게 넘겼고 사후인 1784년(정조 8) 익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각종 개혁을 주도하다
홍봉한의 고속 승진이 계속되는 시기는 영조의 주도 하에 국가 전례(典禮) 정비 및 각종 제도 개혁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즉 법전인 「속대전」과 의례서인 「속오례의」의 간행을 비롯해 균역법(均役法)의 제정 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홍봉한은 외척이면서도 탕평관료로서 다양한 제도 정비와 개혁을 주도하였다. 홍봉한은 “한 마음으로 성주(聖主)의 탕평지치(蕩平之治)를 도왔으며” 특히 균역청당상으로 균역법의 제정과 정착 과정에 참여하였다.
영조대는 도성 방위 강화를 목적으로 1751년(영조 27)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발표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시행 세칙인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발표한 바 있다. 홍봉한은 여기에 더해 임진강 일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절목을 제출한 바 있다.
임진강 일대의 방비에 대해서는 이미 숙종 연간에도 그 방비의 중요성이 거론된 바 있으며,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도 이곳에 대한 방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수도 방위를 위해서는 임진강의 방비가 필수적인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일시적인 대책만이 강구되었다. 홍봉한은 총융사로서 항구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구체적인 절목을 만드는 작업을 주도하였고, 영조로부터 임진을 경략하는 책임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홍봉한은 또한 공노비의 신공 감면 문제를 주도하였다. 공노비의 경우 직접 입역은 폐지되고 납공만이 행해졌다. 납공 노비의 존재는 신분 문제 뿐 아니라 국가 재정 면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공노비의 수가 점차 감소하였다. 이에 영조대 중반 탕평파들을 중심으로 변통안이 논의되었다. 공노비의 신공 감면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양역 변통의 결과 균역법이 제도적으로 정비되고 이를 관장하는 균역청이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였다. 당시 공노비 감면은 이천보를 비롯해 홍봉한 등이 주도하였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민들이 혜택을 받게 되었으므로 이제 시노비(寺奴婢)가 가장 긍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결국 홍봉한, 김치인, 이성중 등이 구관당상으로 선임되어 1755년(영조 31) 2월 내시노비감포급대윤음(內寺奴婢減布給代綸音)이 발표되었다.
이밖에 홍봉한이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한 사업이 개천(開川, 오늘날의 청계천) 준설 사업이었다. 홍봉한이 준설 문제를 거론한 것은 1751년(영조 27) 5월이었다. 그는 도성내 개천이 토사로 막혀서 큰 홍수가 나면 민가들이 모두 표몰된다고 우려를 표시하며 준설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11월에도 성중의 개울이 거의 막혀서 매번 여름 장마철을 당하면 개울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난 갈 준비를 하고,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자도 발생한다고 하면서 준설 사업의 시급함을 언급하였다.
당시 많은 관료들이 준설 사업 자체에는 동조하였으나 바로 사업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후 홍봉한의 문제 제기가 있은 지 약 8년여가 경과한 1759년(영조 35) 구관당상이 정해지고 절목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760년(영조 36) 이른바 경진준천(庚辰濬川) 사업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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