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섬긴 왕… 조선왕조 500년 기틀 다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열흘 전에 태종이 한 말이다. 상왕 태종의 지극한 후원을 받으며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 세종(世宗, 1397~1450)은 조선의 문화를 “때 이른 절정”으로 만들었다.
세종의 정치철학은 하늘이 내린 백성[天民]과 즐거움을 나누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이며 백성들이 삶의 기쁨을 즐기는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는 빼어난 인물들이 적지 않았지만 세종만큼 현대 한국인들의 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은 달리 찾을 수 없다.
여주 영릉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애민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창조성과 자주성, 그리고 실용성
조선 최고의 경세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李珥, 1536~ 1584)는 “우리나라 만년의 운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혔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지고 인구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세종을 모범으로 삼았던 제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는 여주 영릉을 참배한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은 모두가 세종의 제도가 아닌 것이 없는데 그 큰 규모와 아름다운 법을 이제까지 준수하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라며 세종의 공적을 기렸다.
한편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통찰한 함석헌은 세종을 “하늘이 낸 임금”이며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세종의 업적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 평가가 다르지 않다. 스승의 날을 세종의 탄신일인 5월15일 (음 4월10일)로 삼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종시대의 문화는 창조성과 자주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연결되는 실용성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실용지학에 투철한 세종의 자세는 경기의 정신과 연결돼 있다. 세종시대의 풍요로움은 과학기술의 성과를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15세기 초반 세종시대에 이룩한 과학기술의 수준은 세계 최고였다. 일본의 이또 준타로 등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에 세종시대에 이룩한 과학기술의 성과는 21건으로 동시대 중국 4건, 일본 0건, 유럽과 아랍을 합친 19건보다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 인재가 먼저다
세종시대가 이룩한 놀라운 문물은 인재를 잘 활용한 결과였다. 세종이 목표했던 왕도정치를 뒷받침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물제도의 연구와 정리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즉위 초기인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젊고 능력 있는 학자를 집현전 학사로 선임했다.
학사들에게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는 특권을 주어 신분을 안정시키고 급료를 넉넉히 주었으며 장기휴가인 사가독서제를 주어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들을 통해 세종은 농업 과학 의학 국방 등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집현전 학사는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양성지 정인지를 비롯한 70여 명에 달했다. 훈민정음의 창제, 공법(貢法)의 제정, 형벌제도의 정비, 고려사 편찬, 지리지와 의학서, 농서의 편찬은 모두 집현전에서 이뤄졌다.
이처럼 세종은 유능한 인재들이 자신의 뜻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세종이 육성한 과학인재 중에 장영실을 빼 놓을 수 없다. 기생의 자식이며 노비인 장영실을 발탁해 관리로 채용하고 종3품의 벼슬까지 주면서 재능을 발휘하도록 지원하여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같은 첨단 기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세종은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도록 했으며 세종 스스로가 우리 역사 속에 나오는 흥망사례를 모은 ‘치평요람’의 편찬을 주도했다. 활자개발로 이러한 출판사업을 뒷받침하였다. 이때 만든 갑인자는 조선 후기까지 사용했는데 인쇄 속도가 기존보다 10배나 향상됐다.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개발하고 이를 정리한 ‘농사직설’을 출판하고 널리 배포한 일도 과학기술이 뒷받침한 것이다.
■ 자주 국방, 유비무환의 정신
세종은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힘을 쏟고 나라의 영토를 확장했다. 남북에서 조선의 변방을 위협하는 여진과 왜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국가와 백성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국왕의 기본 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기해년(1419)에 태종의 뜻을 받들어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의 준동을 근절했으며 지난 1433년에는 건주위 도독 임만주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침략하자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정벌을 감행했다.
세종은 여진족을 격퇴에 성공한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영전시켰다. 세종처럼 무인을 우대한 임금은 달리 찾기 어렵다. 경원부를 야인을 방어하기 쉬운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논의가 나왔을 때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조상의 강토는 한 치라도 줄여선 안 된다는 것이 내 본 뜻이다.
여태껏 야인들이 우리가 국경을 줄이는 대로 침식해 들어왔는데, 지금 또 지켜 내지 않고 안일하게 물러서기만 하다면, 함길도 평안도에서 경상도 거제까지도 한 가지로 우리 땅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논은 조상들의 영토 개척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니, 다시 생각하라”며 북진을 고집했다.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를 내세워 4군6진을 개척해 영토를 넓히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세종은 여진과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화약과 화포개발에도 정성을 들였다. 새롭게 창안하고 개량된 화기는 파저강 토벌에 사용하여 전공을 이루었다. 화약의 성능을 크게 개량했으며, 화기 교본인 ‘총통등록’을 편찬해 군사들을 교육했다.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 여민(與民), 백성과 함께 하면 된다
세종은 정치의 출발을 백성과 함께 하는 데서 찾았다. 토지개간을 장려하기 위해서 밭을 개간하면 세금을 면제해주는 법을 시행하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백성들이 신고한 밭이 진짜 새로 개간한 밭인지, 아니면 예전에 개간한 밭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며 불만을 토로하자 세종은 “백성과 함께 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백성과 함께 하면 된다”는 ‘여민가의(與民可矣)’라는 네 글자는 세종의 정치철학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세종은 나라의 틀에 혼을 불어 넣으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창조적 노력이 이루어져 조선의 고유한 문화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유교국가의 완성이었다. 조선 건국에 참여한 유학자들이 이미 유교국가의 뼈대를 만들어 놓았다. 세종은 여기에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 넣어 국가제도 정비에서 농업의 진흥에 이르기까지 유교 원리가 적용되는 조선을 만들었다.
세종은 철저한 실용주의였다. 음악 역법 학술 같은 분야에서 중국 문물을 도입하되, 마지못해서 들여오는 정도가 아니라 독자적 운용이 가능할 만큼 완성도를 높여나갔다. 백성의 삶과 생활에 관계되는 실용적인 분야에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같은 책을 편찬해 독자성을 구축했다.
세종은 도입한 고등문명을 토착화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이러한 과제를 성공리에 수행했다.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의 빼어난 성과들은 조선을 중화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열망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상대를 살리는 화법
세종은 대화를 할 때 상대의 의견을 존중했다. 신하의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흘러나오도록 ‘말길[言路]’을 터 주었다. 그것은 “그래, 네 말이 옳다”라고 동의하는 것이다. 설령 자신과 의견이 반대되는 것이어도 상대를 살리는 말을 사용했다. 또한 세종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결정을 내려 밀고 가기 보다는 신하들에게 의견을 제시하게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나갔다. 신하들은 국왕에게 의견을 밝힐 수 있는 언로를 매우 중요시했으나 백성들의 언로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백성들의 말길을 터준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세종의 열린 자세는 실학으로 모습을 새롭게 해 조선후기를 밝혔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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