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사모한… 조선시대 가장 독창적 사상가
개성의 명기 황진이가 꼽았다는 ‘송도 삼절’은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황 진이 자신이다. 서경덕과 황진이의 일 화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이 신라의 고승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 랑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원효와 서 경덕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를 비롯한 저술이 중국과 일본에 전해 져 영향을 끼쳤던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경덕의 ‘화담집’이 중국 의 고전을 집대성한 ‘사고전서’에 조선 유학자의 저술로는 유일하게 포함됐다 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 무튼 한국의 독창적인 사상가 두 사람 이 모두 여성 문제의 일화를 남기고 있 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승려인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 파계해 대유학자 설 총을 낳았고 유학자인 서경덕은 황진 이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제 관계로 발 전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기에 충분하다. 화담 서경덕은 조선 유 학사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매력적인 사상가이다.
■ ‘제소리’를 낸 빼어난 사상가
조선은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만큼 빼어난 학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朱子)’로 불리는 주희의 권위에 압도를 당해서 그런지 자신의 목소리를 낸 독창적 유학자는 아주 드물다. 그런 면에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제소리’를 분명하게 낸 빼어난 사상가이다. 서경덕의 사상은 조선의 유학사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리(理)를 중심으로 자연과 사회를 해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기(氣)를 범주로 세계를 설명한 기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경덕의 독창적 사상을 퇴계나 율곡 같은 후배 학자들이 불온하게 봤던 것은 조선 사상계의 불행이다.
장지연은 ‘조선유교연원’에서 서경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미간이 시원하고 눈이 샛별처럼 빛났다. 집안 형세가 한미하고 고단했으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가업으로 삼아 아주 가난하였지만,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하였다”
■ 종달새를 보고 자연의 이치를 깨치다
서경덕은 개성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풍을 본적으로 하는 아버지 때부터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그런 아버지마저 일찍 여의어 서경덕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어느 봄날, 아침 일찍 나물을 뜯으러 나갔던 서경덕이 날이 저물어 서야 돌아왔으나 나물은 조금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까닭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나물을 뜯는데 어린 종달새가 풀숲에서 날아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날다가 떨어졌지만 다음 날엔 좀 더 날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느라 나물을 얼마 뜯지 못했습니다”. ‘화담 연보’에 따르면이 일화는 서경덕이 일곱 살 때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서경’을 공부하면서 혼자 보름 동안 궁리해 한 해가 365일이 된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18세에는 ‘대학’을 읽다가 “지식을 얻으려면 사물을 검토해 그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致知在格物)”는 구절을 보고 “배울 때 먼저 격물하지 않으면 독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며 탄식했다. 이때부터 집안의 벽마다 천지 만물의 이름을 써 붙여 놓고 날마다 그 법칙을 탐구하기에 힘을 쏟았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이치를 깨달을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침식을 잊을 정도의 지나친 사색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지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20대와 30대 두 차례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했다. 서경덕은 선배 철학자들의 학설과 중국의 선진 철학가들의 사상을 널리 연구했는데, 특히 그들이 해명하지 못했던 문제를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 가난하지만 삶을 긍정한 철학자
송악산 아래 화담에 초막을 짓고 살며 공부에 열중하던 서경덕이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43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했다. 합격한 뒤 생원이 돼 성균관에 들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1540년에 정암 조광조(1482~1519)가 학문과 행실이 빼어난 선비 마흔 명을 조정에 추천했을 때 서경덕은 그 첫머리에 들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시 4년이 지나 후릉 참봉(厚陵參奉) 벼슬을 내렸지만 역시 거절했다. 서경덕은 가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는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비록 살림은 가난했으나 기상은 밝고 활달했다. 삶을 긍정했으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즐거움을 감추지 않고 흥겨우면 춤을 췄다.
화담은 탁월한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다. 손재주도 좋아 나무를 깎아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었다. 택당 이식은 이렇게 말했다. “이(理)와 수(數)의 학문은 소강절의 뒤를 따라 조광조 이후에는 화담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며 개성과 서울 두 곳의 학문하는 선비들이 와서 배운 사람이 많았고 문인 가운데서 명성을 얻은 자도 많았다”
■ 죽음은 생보다 근원적이다
서경덕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퇴계에 비해 율곡은 “만약 그를 만났더라면 십년 책을 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을”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화담은 독서하고 이치를 연구하면서 문자의 뜻에 구애받지 않고 많이 사색해서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묘처에 대해 분명하게 자득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남에게 의지하여 모방하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화담이 기는 불멸이며 현상적인 기의 본체가 태허(太虛)라고 주장한 데 반해, 율곡은 기는 소멸하며 본체가 아닌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화담은 모든 존재는 결국 사멸하지만 그 기만큼은 본체인 태허(太虛)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모든 존재는 태허에서 와서 다시 태허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화담은 천지만물을 기가 모여 형성된 것으로 봤다. 화담에 따르면 이 세계는 음양이라는 두 개의 기(二氣)가 생생화화(生生化化)하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생생화화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생사도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봤다. 따라서 죽음이란 두렵거나 회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할 사안이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처음으로의 복귀이며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자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죽음은 생보다 근원적이다. 화담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내 이미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 말은 자신의 철학에 대한 확신이자 그 실천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 설화의 주인공, 가난한 백성들의 영웅으로 기억되다
서경덕은 풍수설에 의거한 묘지 경영 등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아래는 서경덕이 국왕 인종에게 올리려고 작성한 상소문의 일부이다.
“산릉에 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운이 융성하여 나라가 천년까지 지속된다면 능들이 경기도 교외에 즐비하여 밭과 들이 온통 황폐해져 남는 땅이 없게 될 터이니, 백성들은 거주할 곳을 잃어 백 리 안에 인적이 끊어질 것입니다. …산릉에 쓸 돌을 채석하는 일도 경기지역 백성들에게 큰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당시 인종은 승하한 부왕 명종을 위해 대대적인 산릉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칫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불온하고 과격한 주장이었다. 상소도 그래서 결국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서경덕은 농민 생활을 위협한 산릉 역사를 비롯해 부역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수탈이 심하지 않던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힘써 주장했다. 서경덕의 토지 겸병을 반대하는 사상은 실학파의 선구인 반계 유형원(1622~1673)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 서경덕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설화를 보면 서경덕은 퇴계, 율곡 같은 학자들과는 달리 천문지리에 통달해 신통력을 발휘하며 약자를 돕는 민중의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다. 능력과 인품이 빼어나지만 소탈한 성품으로 민중들과 편안하게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 “화담선생이 이술을 하여 선방의 비기(秘記)가 있고, 굼벵이가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듯 환생하는 술법을 가졌다”는 소문까지 널리 퍼졌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화담의 제자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1517~1576)은 민중들의 질문에 상담하며 민중 속으로 파고든 사상가였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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