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화를 꿈꾼 선각자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됐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귀국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집필했다.
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역사는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 사관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론은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계산학교·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며,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을 저술, 간행했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했다. 1914년 사망했고, 묘는 하남시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