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9일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어요. 그의 동료 이종창이 피 흘리는 그를 부축하자,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 정태원은 그 장면을 촬영했죠. 그 사진은 다음날 언론들의 머리기사로 실렸어요.
1960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광산업전수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1983년까지 선반보조공, 재봉틀수리공, 보일러공, 전기 용접공, 목수 등의 일을 하다가, 그의 벗 김환영과 서울 합정동에 화실을 열고 홍익대생들의 미술세미나에 참석하며 그림을 시작한 현장미술가 최병수.
1986년 정릉벽화사건에 연루돼 경찰조사를 받던 중 졸지에 ‘국가공인’ 화가가 된 최병수는 그렇게 신문에 실린 이한열을 판화로 새겼어요.
그러나 작은 판화로는 그 사건이 촉발한 6·10항쟁의 민주화 물결을 담아낼 수 없었죠. 그는 이한열이 활동한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그 장면을 다시 거대한 걸개그림으로 창조했어요. 1980년대 초반 미술동인 ‘두렁’이 실험하고 탄생시킨 걸개그림은 그에 의해 광장의 미술로, 혁명의 미술로 재탄생하게 된 거예요.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민중미술이 소집단 미술운동에서 변혁의 미술로 탈바꿈하게 된 상징적 작품이라 할 수 있죠. 불교의 괘불화는 일정한 틀(액자)에 고정되거나 붙박이 그림으로 전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두루마리나 족자형태로 제작되어 보관되다가 대중법회 등의 야외 행사에 내걸리는 것이 보통의 형식이에요.
그러나 걸개그림은 법회가 아닌 집회에서 사용되었고, 장인이 아닌 여럿의 미술인들에 의해 공동창작되었으며, 종교적 신심이 아닌 대중적 선동과 시위를 위해 걸렸죠.
작은 마당보다는 큰 마당, 즉 광장에 내걸릴 때 정치적 힘을 발휘했고, 박종철·이한열·강경대와 같은 열사의 죽음 앞에 설 때 그것은 미학과 정치성을 뛰어넘는 공동체적 영성의 연대를 만들어 냈어요. 그런 걸개그림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 걸개그림은 공동창작에 의해 기획, 제작돼요. 많은 걸개그림들은 미술동인, 미술패, 민화반, 판화반으로 불리는 다양한 소집단과 동아리에 의해 제작되었어요. 최병수는 ‘기획자’라는 주필에 해당하며, 공동창작자들을 리드하죠.
둘째, 걸개그림은 현장미술로써 현장성이 생명이에요. 내걸리지 않는 걸개그림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죠. 걸개그림의 소통은 오직 그것이 광장에 내걸렸을 때 발생해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걸개그림이 타전하는 회화적 이미지를 통해 집회의 청각적 언어를 응집시켜요.
셋째, 괘화와 달리 걸개그림의 목적은 분명해요. 걸개그림은 그 자체로 미학적 완성을 성취할 수 없어요. 걸개그림의 미학적 가치는 그것이 더 많은 민중들과 더불어 하나의 외침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에요.
6.10민주항쟁 30주년. 다시 우리는 한열이를 살리는 그 마음과 외침으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할 거예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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