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사대부 문인이자 대표적인 천문수학자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은 형인 남병철(南秉哲, 1817-1863)과 더불어 의령 남문 출신을 대표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중의 한 사람으로서 19세기 학풍을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남병길의 자는 자상(字裳), 호는 육일재(六一齋) 또는 혜천(惠泉)이다. 형인 남병철과 더불어 부모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의 우애가 남달리 깊었다고 전해진다. 부친은 남구순(1794∼1853), 모친은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안동 김씨이다.
남병길은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남용익(1628∼1692)의 8대손이며, 순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1760∼1840)의 4대손이다. 외조인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다져 놓은 인물로 남병길의 가문은 헌종·철종 대의 세도정치기에 권력의 중심부에 속해 있었다. 의령 남씨 집안은 후손이 귀하여 양자를 맞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부 남종헌이 3대 독자였다가 후손이 없자 동생인 남주헌의 아들, 즉 남병길의 부친인 남구순을 양자로 맞았다. 남병길은 형인 남병철과 함께 양자로 간 남구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병길은 1850년(철종 1)에 문과에 합격한 뒤, 관직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고 천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어 관상감제조도 겸직하였다. 제조(提調)라 불리는 관직은 조선시대에 잡무와 기술계통 기관에 겸직으로 임명되었던 고위 관직으로 당상관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료들이 맡았다. 관상감제조는 관상감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므로 이 자리에 오른 뒤 관상감 조직을 혁신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학과 천문학의 천재라 불린 남병길은 특히 천문에 가장 능통하여 당대 제1인자였다. 형인 남병철과 더불어 청빈하고 강직한 관료로 평생 공직 생활을 하였으며, 지방 관찰사로 지낼 때는 항상 어렵고 약한 사람 편에서 일을 하였다. 아첨과 불의를 남달리 싫어했던 그는 부모에 대한 효도는 물론이고 형인 남병철과의 우의도 두터워 형과 형수를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1851년 남병길은 약관 32세의 나이로 평안남도 함천 고을의 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당시 성천 고을은 극심한 가뭄으로 도적이 들끓어 행정 질서와 치안 상태가 아주 문란한 상태였다. 매섭고 강직한 성격의 남병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 하는 사람들의 죄를 철저히 규명하여 풀어주고, 도적들을 잡아 가두어 치안 질서를 바로 잡았다.
여기 저기 곡식을 상납하라는 지시에도 응하지 않고 재정을 튼튼히 하여 그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또한 곡식들을 창고에 잘 저장해 흉년에 대비하였는데, 이듬해에도 극심한 흉년으로 전국에 굶어 죽는 자가 많았으나 성천 고을은 저장해 놓은 곡식으로 백성들을 잘 보살펴 흉년의 어려움을 지혜롭게 잘 넘겼다고 한다. 그의 선정은 중앙까지 알려져 1857년에는 38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관료 생활을 하던 중에 겪은 부친의 사망은 3년간 학자로 되돌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친이 사망한 1853년에 형인 남병철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남병길은 병조판서로 한성에 있었다. 두 형제는 부친의 병이 위태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부친의 병간호에 매달렸지만 그해 10월 16일 부친상을 당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남병길은, 이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학문적 열의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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