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18. 탁월한 식견 지닌 조선시대 학자 이항복

당파 초월한 우국충정… 국난 극복 이끈 ‘오성대감’

▲ 이항복 선생 묘
우리는 왜 이항복의 삶과 사상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갖고 있는 깊은 도량과 나라를 운영하는 철학과 이를 조율하는 사상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당파를 초월해 국난을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는 우리 역사 속 수많은 지도자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조선 중기 위대한 학자 계곡 장유는 이항복에 대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항복이 유배지 북청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제문을 쓰며 “유도(儒道)는 종장을 잃고(斯文失宗匠矣), 나라는 주춧돌 잃고(國家失柱石矣), 군자는 의지처 잃고(善類失依歸矣), 정론은 표적을 잃었도다(正論失標的矣)라고 했다. 나라의 가장 중심인물이었던 이항복이 죽음을 너무도 애통해했다.

 

조선의 4대 문장가의 하나로 평가되는 월사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완전에 가까운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했다.

 

학자들만이 이항복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가장 영명하다고 평가되는 정조 역시 이항복에 대해 『홍재전서』일득록(日得錄)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백사 이항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 중에서 하나만 얻어도 어진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몸에 겸했음에랴. 세상에 전하는 우스개들이 꼭 모두 그가 행한 것은 아니겠지만 백성이 지금까지도 그를 아끼고 사모하고 있는 까닭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파천하던 날 밤 궁궐을 지키는 위사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홀로 손수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임금을 내전으로 인도했고,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자 개연히 호종을 자처한 인물은 공 한 사람뿐이었다”

 

『순조실록』에 기록된 이항복에 대한 평가는 더욱 새롭다. 순조 8년인 1808년 11월19일 늦은 밤에 임금과 신하들이 중국 역사를 공부를 하다가 한나라 시대의 장량과 진평에 버금가는 조선의 인재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때 박종훈은 우리 역사에서 장량과 진평에 대견할만한 인물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라고 대답했다. 선조시대와 광해군 시대의 이항복에 대해 정조의 높은 평가와 순조대 임금과 신하들의 높은 평가는 이항복이란 인물이 갖고 있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화산서원
화산서원
이항복은 어떻게 성장하였길래 정조에게 이와 같은 평가를 들을 수 있었을까.

이항복에게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역시 부모님일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이몽량(夢亮)으로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이다. 고려 말 중국에서 도입된 성리학을 최고의 경지에 이른 학자가 바로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은 목은 이색을 제자로 두고 이색은 정도전과 정몽주를 제자로 두었다. 정몽주는 비록 고려 말에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조선시대 사상사의 종조(宗祖)가 됐다.

 

그러니 이제현의 학문은 조선시대 사상사의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훗날 이항복이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한 율곡 이이에게 학문을 배우게 됐으니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본관이 경주인 이항복의 집안은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많은 영의정을 배출한 집안으로 평가받는 삼한 갑족(甲族)중의 갑족으로 평가받는 집안이 됐다. 

이제현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몽량은 그의 아내 전주 최씨 사이에서 1556년(명종 11)에 이항복을 낳았다. 이항복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민간에 설화로 많이 남아있는데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많은 설화 중에서도 이항복의 도량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여종에 대한 이야기다. 

보통 양반의 자식들이 여종들을 무시하며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이항복은 어린 시절부터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있었다. 여섯 살 때 물건을 훔치는 여종을 보고 혼을 내지 않고 그 여종에게 가서 물건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게 하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였다. 만약 이항복이 여종에게 혼을 내거나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했다면 아마도 여종은 엄청난 곤욕을 치루고 평생 이항복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종은 어린 이항복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그에게 혼신의 정성을 다했다고 하니 이항복의 도량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다.

 

이항복은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16살에 잃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이항복은 아마도 인생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가 8살 때 아버지의 뜻에 의해 칼과 거문고를 소재로 지은 시는 이항복이 얼마나 어린 시절부터 조숙하고 영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칼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劍有丈夫氣),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담기었네(琴藏千古音)” 이 시를 누가 8살의 소년이 지었다고 하겠는가!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사물의 이치와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했기에 이항복은 아버지를 여의고 삶에 의욕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격려와 자극은 그로 하여금 다시 공부에 매진하게 했고, 장인인 권율보다도 먼저 문과에 급제하게 했다.

이항복 선생 영정
▲ 이항복 선생 영정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가 된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생략하겠지만 그가 권율의 아버지인 영의정 권철의 집에 가서 권씨 집안 노비들의 행패가 잘못됐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항복은 비록 자신과 의견이나 당파가 다르더라도 그가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인물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보호해주려 노력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퇴계 이황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에 대한 변호였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도 변명해줬다.

이항복은 김성일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마저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을 때 민심이 소란스러워져서 전쟁도 하기 전에 나라가 망할까 걱정해 일부러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며 선조에게 김성일을 두둔해줬다.

이항복은 율곡 이이의 제자이기 때문에 당파로 보자면 당연히 서인이었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니 그는 동인이었다. 서인인 이항복이 동인인 김성일을 옹호해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었지만 이항복은 전쟁의 와중에서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려고 한 것이다.

 

이항복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이러한 이항복의 결정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생각한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4일의 기록은 이항복의 발언을 보자.

 

“거가가 떠난다는 명이 내리자 대궐 안이 벌써 비었으니 성을 나가는 날에는 따르는 자가 틀림없이 적을 것이다. 만약 서행(西行)이 계속돼 국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강 하나 사이가 바로 중국의 강토이니 거기에 가서는 응당 교섭하고 대응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능란하며 경우 바르고 말솜씨 있는 사람은 유성룡 정승만 한 이가 없다. 거가가 떠나면 한양은 필시 지킬 수 없을텐데 유 정승이 여기에 머문다면 패전한 신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거가를 호종하여 간다면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조정 관료들 모두가 도망갔음에도 그는 선조를 지켰다. 세상의 의리(義理)를 그는 끝까지 실천한 것이다. 그는 조선을 돕기 위해 구원병을 보내려는 명나라의 오해를 풀어주고, 세자인 광해군을 도와 전국의 의병을 일으키는데 참여했고 그로 인해 그가 가지 않은 지역은 없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1600년에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됐다. 그의 헌신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임진왜란 이후 이항복은 국가 재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파를 초월하고 오로지 백성의 삶을 생각한 그였기에 권력의 장악 따위는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광해 임금이 들어서고 대동법을 적극 지원하고 구휼법 확대에 가장 앞장선 이가 바로 이항복이었다. 조정의 관료들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북인들의 행동은 이항복을 조정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게 두지 않았다. 광해군 최대의 실수인 인목대비 폐비에 대해 적극적 반대한 이항복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지도
여지도
그러나 이항복의 넓은 도량과 합리적 사고 그리고 우국충정의 정신은 이항복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후손이 바로 이회영이었고, 이회영은 6형제들의 모든 재산을 팔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만들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회영과 6형제들의 목숨을 건 항쟁은 이항복의 정신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항복을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백성을 위한 자신들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런 인물과 가문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참으로 모르겠다.

김산 홍재연구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