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 1731~1797)의 선계는 종친인 양녕대군파이다. 그의 큰아버지 이정걸(李廷傑)이 윤증(尹拯)의 문인인 것으로 보아 소론의 당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남산아래에서 성장했고, 1771년 41세에 늦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옥과현감, 공주판관 등을 역임하는데 그쳤지만, 그의 아들 이동직(李東稷)은 순조년간 대사헌을 역임하며 현달하였다.
거의 평생을 재야의 학자로 지낸 이종휘의 학문적 성장 배경에는 18세기 서울학계의 학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변화위에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학계는 경직된 학문 자세에서 벗어나 구급의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고, 폭넓은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로운 학풍이 확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세례를 받은 이종휘는 특히 문학에서 정통의 문장을 알기 위해 이단으로 배척되는 문장까지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은 실천에 장점이 있다고 인식하였다.
왜 고대사에 관심을 가졌는가?
조선중기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성리학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역사서술인 강목체(綱目體)가 역사서술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었고, 중화주의의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는 기자(箕子)를 재해석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성리학적 보편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이었다.
이후 양란과 명·청의 교체라는 배경 아래에서 한국사로서 ‘동국(東國)’에 대한 탐구는 강화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고대사의 발견, 기자의 재인식, 발해의 재발견, 새로운 한국사 공간의 확대, 역사연구 방법론의 진전으로 나타났다.
이종휘는 새로운 문명사회의 이상을 찾기 위해 과거 고대사로 학문적 탐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소중화의 문화국가 건립을 위해서는 기자의 문화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중국은 이미 청나라의 등장으로 ‘중국=중화’의 지위를 상실했으므로 그 이상사회의 전통을 한국사에서 찾았던 것이다.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
이종휘의 대표저술은 기전체 사서인 <동사>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단군본기>와 <기자본기>를 나란히 설정하므로 써 단군과 기자를 통합적으로 이해했다. 단군과 기자에 대한 관심은 당시에 유행했던 소중화주의 내지 조선중화주의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중화민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단군을 주목했고, 이것이 이어져 단군에서 부여와 고구려에 연결되었던 것이다.
곧 단군과 기자에 주목하면서 우리 고대사의 강역[영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 때문에 삼국 중에도 단군과 기자의 영역에 가장 많이 포함되었던 고구려까지 상대적으로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이종휘의 역사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적으로 이종휘는 기자가 조선에서 문화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했다. 기자의 유풍이 고구려에 계승됨으로서 고대의 유교 문화가 꽃피웠던 것으로 보았다. 또 고구려는 부여와 함께 단군의 혈통을 계승했으므로 단군의 혈통과 기자의 문화를 동시에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 점에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인식하게 된 근거가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18세기 단계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조선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소화하여 새롭게 만든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동사>에는 열전에 고구려인이 많이 수록되었고, 9개 항목의 지(志)도 고구려 중심으로 되어 있다. <부여세가> 등에 보면 고구려의 종족상의 계통은 단군으로 올라간다. 또한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은 단군 기자이래의 도읍이었던 평양에 고구려가 수도를 삼았다는 점도 작용한다.
신라와 백제는 조선의 변방이고 고구려만이 조선을 차지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큰 줄기만을 언급했다는 표현에서 고구려 중심 인식이 드러난다. 또한 고구려는 동방의 대국이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영토가 패수(浿水)를 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유교문화의 전승차원에서도 고구려는 예의와 의관·문물과 음악이 정비된 나라로 파악하였다. 기자의 유풍을 계승함으로서 신라 백제에 비해 유교 문화가 발달했고 때문에 고대사의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에까지 이어졌다. 발해는 5천리의 땅을 차지했으며 백성들에게 의관·예악을 갖추게 하여 소중화의 나라가 되었다. 이에 시조 대조영은 기자이래로 으뜸가는 인물로 평가했다.
이종휘는 당시 문명의 중심인 중원대륙이 오랑캐의 차지가 된 상황을 고대사의 강역에 대한 확장과 기자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이를 넘어서려 하였다. 청나라에 맞서는 과정에서 종래 부정적으로 보았던 고구려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여 실학시대 역사 연구의 중요한 업적이자 근대 민족사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동사>에 나타난 역사인식은 한국사에서 첨예한 해석의 지점으로 볼 수 있는 ‘주체와 사대’, ‘민족과 보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종희는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문화를 영가(詠歌)하여 김부식이래 역사가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여 특유한 발명과 채집이 없다하여도 다만 이 한가지로도 불후에 치(置)할 것이다.
이처럼 <동사>는 신채호 등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주목을 받았다. 전근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역사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했던 것이다.
글_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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