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영화감독 블랙리스트와 좀팽이 보수

저항하며 성장한 386 영화감독들
권력이 만든 살생부에 죽지 않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넘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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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래히트(Bertolt Brecht)를 몰랐다. 그의 음악극 ‘예외와 관습’도 처음 접했다. 음악 담당으로 참여한 건 그저 재미였다. 나중에야 모든 걸 알았다. 그 작가와 그 희곡은 전두환 정권이 정한 ‘금기’였다. 반전(反戰) 작가여서고, 마르크스주의 작가여서다. 다른 것도 알게 됐다. 나를 뺀 모든 연기자들이 운동권이었다. 객석에 정보과 ‘박 형사’가 보였던 이유다. 니글거리는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역하다. 80년대, 수원의 한 허름한 무대의 추억이다.

그랬다. 386 시대 학생 연극은 그랬다. 순응(順應)을 거부했고 저항(抵抗)을 얘기했다. 대사(臺詞)를 읽지 않고 구호(口號)를 제창했다. 연기(演技)라 보지 않고 궐기(蹶起)라 생각했다. 연극반은 그러고 싶은-저항하고, 구호 외치고, 궐기하고 싶은-학생들의 집단이었다. 굳이 어느 학교냐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어느 학교든 연극반은 다 그랬다. 데모와 사상 학습의 선두에 늘 연극반이 있었다. 그건 80년대 대학 연극이 갖고 있던 양보 못할 자부심이었다.

2000년대. 386이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 연극쟁이들도 덩달아 주류가 됐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영화들이 등장했다. ‘웰컴 투 동막골’도 그랬다. “우리가 쳐내려 갔소?”(인민군 소년병 택기). “미군과 국군이 한 패면, 2대 1이잖아. 치사하다야”(동막골 아낙). 북침 의혹을 암시하기도 하고, 한미 공조를 비난하기도 한다. 순진한 동막골 노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도 국군이다. 반공(反共)과 멸공(滅共)으로 학습된 기존 영화계가 받은 충격이 컸다.

보수의 눈에 어지간히 거슬렸을 게다. ‘좌빨’이 만드는 ‘빨갱이 영화’로 보였을 게다. 2007년 보수가 정권을 탈환하면서 판이 흔들렸다. ‘웰컴 투 동막골’류의 영화들이 사라졌다. 그즈음 M이 말했다. “친한 영화감독을 만났다. 좌파 감독들의 이름을 쭉 써 보라고 했다. 이름 좀 있다는 감독들을 전부 적더라. 영화계가 큰일이다. 완전히 좌파들 세상이 됐다.” 정보기관의 장(長)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의 말이 블랙리스트의 시작이었던 듯하다.

돌아보면 부질없는 짓이었다. 군부 독재에서 단련된 맷집들이다. 그런다고 없어질 그들이 아니었다. 부라리며 째려보고 밥줄 좀 끊는다고 겁낼 그들이 아니다. 10년 만에 진보 정권이 돌아왔다. 그와 함께 그들도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돌아왔다. 전 국정원장을 고소하고, 전 대통령을 고소했다. 전 국정원장이 오랏줄에 묶였고, 전 대통령도 끌려 나올 태세다. 극장은 다시 그들의 차지가 됐다. 진보와 민주로 각색된 영화가 스크린을 장악했다.

대한민국 보수. 그들에게 영화는 우군(友軍)이었다. 권력의 뜻을 주입하는 수단이었다. ‘월하의 맹세’(1923년ㆍ윤백남 감독)가 그렇게 일제를 미화했고, ‘해방된 내 고향’(1947년ㆍ전창근 감독)이 그렇게 해방 후 건국을 미화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만든 ‘쌀’(1963년)도 결국엔 군사 정권의 착실한 홍보 도구였다. 그 속에서 길들여진 보수의 영화관(觀)이다. 인민군을 착하다 하고, 국군을 야만스럽다 하는 영화가 곱게 보일 리 있나. 여기서부터 꼬인 거다.

학창 시절, ‘돌멩이’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브래히트를 경험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극일 뿐이었다. 그 후에도 ‘돌멩이’는 던지지 않았다. 영화도 그렇게 보면 된다. 그저 영화일 뿐이다. ‘웰컴 투 동막골’을 본 650만이 좌빨이 되지 않았다. ‘국제시장’ 본 1천400만이 꼴통 보수가 되지 않았다. 영화가 바꾸는 건 아무것도 없다. 괜스레 권력만 분노했고, 그 분노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고, 그 블랙리스트가 ‘좀팽이 보수’를 만들었다.

보기 싫은 영화라면 안 보면 될 일이지, 그걸 왜 속좁게….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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