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비둘기도 살리고 매도 살리는 방안으로 비둘기 몸무게만큼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저울에 달았다. 그러나 저울 눈금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양다리 양팔 엉덩이까지 다 베어 올렸다. 여전히 비둘기가 더 무거웠다. 결국 수행자는 일어서서 저울에 올라갔다. 그제서야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모은 <본생담>에 나오는 구절이다. 누구나 생명의 크기는 같고 소중하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수행자는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중생 구제 원력을 세운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두 같은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섰다. 현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혁명가는 무력으로 불평등한 세상을 뒤엎으려 했다. 자신의 존엄을 인정받기 위해 수없는 민초들이 싸우다 죽어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 정글의 법칙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과 숲 속 짐승이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짝을 짓고 자식을 낳아, 그가 부모로부터 받았던 것처럼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 보살피다 되돌아가는 생명의 순환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같다.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살아야 한다.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다. 나는 살고 상대방은 죽이는 것이다. 이는 수십억년 동안 형성된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의 몸속에도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자연의 냉엄한 법칙이 뼈와 피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다. 근육이 머리로 바뀌었을 뿐 강한 자가 살아남는 순리는 인간사회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불교는 이 법칙에 반기를 들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양보와 절제로 평화와 행복을 지킨다는 역행(逆行)의 도를 내걸었다. 불교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 원칙인 오계(五戒)만 보더라도 살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의 순리를 거스른다. 다른 생명이나 재산을 빼앗아야 자신이 사는 것이 밀림의 법칙인데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불교의 오계다. 아주 간단한 듯 보이지만 오계를 지키기는 하늘을 떠받드는 것만큼 어렵다. 이유는 남을 해쳐서라도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평화롭게 사는 것은 누군가 그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개인이든 제도든 나 혼자 살면 된다는 밀림의 법칙을 거스르고 인간의 본성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내가 지금 평화롭게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조차 단지 그가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존중하고 대접해야 한다.
수십억년 동안 형성된 본능을 거스르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똑같은 대접을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역추진을 가해야 한다. 한두 명의 현인이나 정치가 무력을 동원한 혁명이 아니라 개인들 모두가 조금씩 힘을 보태야 수십억년에 걸친 불평등과 차별을 없앨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인간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길이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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