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진흥공단이 취업준비생들을 농락했다. 신입사원 모집 때 학력에 제한이 없다면서 실제로는 학교에 등급까지 매겨놓고 있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스카이’ 대학 등 6개 대학에 만점을 줬고, 중앙대, 경희대 등 차상위권 7개 대학에는 14점을 줬다. 비수도권에서는 부산대, 경북대 등 국립대와 영남지역 일부 사립대가 12점으로 가장 높았다. 나머지 대부분의 대학은 10점 이하였다.
통상 신입사원 모집에서 1~2점은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면접의 비중이 클수록 작은 점수가 큰 격차를 벌리게 된다. 중기공단이 위와 같은 학교 등급을 매겼다는 것은 사실상 합격을 특정 대학 수준 이상으로 내정해놨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면서 모집공고에는 ‘행정직, 스펙초월 소셜리쿠루팅 부문에는 학력 및 연령 제한이 없다’고 했다. 그동안 응시했던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을 우롱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블라인드 채용이 등장했다. 우리 사회의 고질화한 학력을 철폐하겠다는 취지다. 스펙 마련을 위한 해외 유학 등 과도한 ‘취업 경비’를 줄이자는 뜻도 있다. 공공기관들이 앞장섰고, 롯데 등 일부 대기업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제 말 잘하고, 인물 좋아야 취직한다’는 시쳇말이 나온다. 학력도 엄연한 실력인데 공개할 수도 없다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제도에 반대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취업 현장에 얼마나 정확히 반영되느냐다. 겉으로는 학력을 보지 않겠다면서도 내부적으로 학력을 챙기는 기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번 중기공단의 예도 국정감사가 없었으면 알려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찬열 의원(국민의당ㆍ수원 장안)이 십수 년치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하면서 확인됐다. 하물며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의 블라인드 채용 파행은 확인할 길도, 제재할 길도 없다.
지금 대학가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을 위한 학원까지 등장했다. 대신 그동안 인기였던 스펙 쌓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정부 발표를 믿고 움직이는 현상이다. 이런 때 ‘사실은 학력을 보고 뽑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나. 정부 정책의 신뢰 상실은 둘째 문제다.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게 대혼란과 상실감을 줄 게 뻔하다. 블라인드 채용을 철저히 운용하게 할 강제 수단을 고민하라. 우선 공기업만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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