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오롯이 견딘 생명력...우리의 삶과 문화를 만나다
본보는 지난 9월 나무에 새겨진 '사람살이의 무늬'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오는 2018년 경기정년 천년을 맞아 기획한 이번 여정은 천년 역사 속에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함이었다. 수원 영통 느티나무부터 이천 도립리 반룡송, 이천 신대리 백송, 여주 효종대왕릉 화양목,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포천 직두리 부부송, 고양 송포 백송까지 총 8그루의 나무에는 우리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베어 있었다.
여정의 시작은 수원 영통 느티나무와 함께했다. 어른 걸음으로 30보 정도의 둘레를 지닌 영통 느티나무는 신도시가 된 지금까지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마을 한 켠을 지켜왔다. 1930년대 베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당시 지역 유지인 오대영씨가 돈을 물어주고 나무를 지켜냈다. 그렇게 보존된 나무는 주민들의 쉴 곳이 됐고, 이제는 신도시가 형성된 이후 사라진 마을 주민들의 또 다른 고향이 되고 있다.
이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두 그루를 만날 수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381호인 도립리 반룡송과 제253호인 신대리 백송이다. 백사면 도립리에 있는 반룡송에는 음양풍수설의 대가 신라말 승려 도선이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도선이 전국을 다니며 택한만큼 천하의 명당에 있는 나무다. 반룡송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신대리 백송 또한 뒤지지 않는 외형을 자랑한다. 전국에 몇 그루 되지 않는 백송 중 하나로 마을 언덕에서 하얀 빛을 내뿜는다. 이천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민들이 기록자로 나서 나무가 가진 이야기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이천문화원은 시민 기록자와 지역의 나무를 주제로 기록사업을 진행 중이다. 시민기록자들은 이천 반룡송과 백송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봐왔던 마을 나무를 조사하기도 한다. “나무를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무마다 스토리를 심어 사람들이 관심 가지도록 하겠다”는 시민의 말이 인상 깊다.
왕릉에서 만난 나무도 있었다. 여주 효종대왕릉 회양목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 마당에 소박한 모습으로 서 있다. 회양목은 본디 낮게 자라는 나무로, 길가 조경수로 흔하다. 여주 회양목은 전국에 있는 회양목 중 가장 크게 자라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천연기념물 제 459호인 회양목은 사람들이 알아봐주지 않아도 한 자리를 지키며 300년 인내의 세월을 보냈다.
천연기념물 제504호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도 마찬가지다.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재실에 개비자나무가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500년 전 화성에 융릉이 조영되며 함께 심은 것으로 추측한다. 개비자나무는 융릉의 주인인 사도세자와 닮았다. 한많은 생으로 ‘생각할 수록 슬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도, 다양한 쓸모가 있지만 좋지 않은 어감을 지닌 개비자나무는 이름에 서러움이 담겨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나무도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올해로 1천100살이다. 사실 그 나이도 용문사 창건연대와 관련해 산출하고 하고 있어, 1천500살 가까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흔히들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됐다고 말한다. 10세기가 넘는 시간을 살아온 만큼 이야기도 많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거나,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은행나무가 됐다는 설도 있고,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 5·16 때에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포천 직두리 부부송은 주위 마을이나 음식점 이름에도 영향을 끼쳤다. 포천시를 상징하는 시목으로까지 지정돼 지역 대표 나무라 할 수 있다. 처진 소나무라 수형이 아름답고 귀한 나무다. 포천의 험난한 지역사를 겪어온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신성한 나무로 여긴 탓에 일제강점기 때 줄기가 잘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두 그루가 다정하게 껴안고 수백년을 버텨왔다. 민간에는 부부의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속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마지막 고양 송포백송은 이천 신대리 백송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백송 중 하나다. 본래 중국 북부가 원산지이지만, 현재는 원산지에서도 멸종 위기에 처해있어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소나무가 됐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의 문화교류사를 알려주는 역사적·문화적ㆍ학술적 자료로써의 가치가 높다.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유하겸이라는 사람이 중국의 사절로부터 받은 백송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송포 백송이라는 설만 보더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주민들의 화합에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 송포 백송이 위치한 덕이동은 농촌 속에 아파트단지가 함께있는 도ㆍ농 복합지역이다. 송산동 주민들은 추수를 끝낸 농민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덕이동 아파트 주민들과의 화합을 위해 ‘백송문화축제’를 만들기도 했다.
아직 돌아보지 못한 나무들도 많다.
그중 내년 10월 경기도로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측백나무는 1910년부터 1967년까지 경기도청이 서울 광화문에 위치했을 당시 경기도청 내 심어졌다. 올해 110살의 나이로 경기도의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는데 의미 있는 나무다. 그동안 경기도는 서울시 측에 나무 이전을 요청했고, 최근 서울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광교신청사 부지로 옮겨지게 됐다.
흔히 지나쳤을지도 모를 나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나이테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숨겨진 나무는 경기도의 과거고 현재 그리고 미래였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나무의 이 같은 노고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취재를 위해 방문했지만, 이미 잘려나갔거나 고사한 나무도 있었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됐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는 “나무는 단순한 고목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오래 살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속에는 문화도 있다”면서 “나무 자체가 옛 선조들의 얼을 느낄 수 있는 문화재라 보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다른 문화재는 없어지면 새로 세울 수 있지만 가령 500년된 나무가 죽으면 500년의 역사가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또 “예전과 자연에 대한 인식이 달라 마을 나무에 대한 의미 부여를 활발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면서 “지금이라도 나무를 직접 보고 앞으로 지역사와 얽힐 수 있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시연ㆍ손의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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