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문화재단이 마련한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에 참여하여 서울의 골목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네팔팔레스타인에서 온 작가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지 모르는 채로 성북동 북정마을과 만해 한용운이 거처했던 심우장, 이태준 고택인 수연산방, 법정스님의 자취와 백석의 시비(詩碑)가 있는 길상사를 둘러보았다.
골목 탐방 이후엔 아시아 각국의 골목을 소재로 한 에세이를 감상하며 상실과 자유에 관해 토론을 나누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전쟁과 내전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다. 베트남 작가 자 응언은 발제문에서 “모든 전쟁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기억의 치유는 상처를 봉합하는 것처럼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치료해줄까? 나는 왜 베트남 국민을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나도록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처럼 비관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것일까?”라며 열광 후에 이어진 탈진에 대해 “가라앉는 골목”이라는 표현을 썼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볼리는 “폐허가 된 마을에서 상상을 하며 놀았다. 문학은 구원이자 생존의 확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지구 아라라트 골목 19번지에 관한 에세이에서 좁은 골목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한 노교수의 죽음이 골목에 가져온 침묵에 대해 썼다.
현재까지도 카스트 제도 아래 살고 있는 발리 여성들의 삶을 소설에 담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작가 루스미니는 발리 덴빠사르의 골목에 대해 ‘변화를 이끄는 골목’이라고 표현했다. 도시의 거리 예술(Urban Street Art)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데 삭막해져 가는 환경에 대해 대중예술이 비판과 위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장을 소개했다.
태국에서 온 우팃 해마무가 묘사한 쑤쿰윗로 33길에는 다양한 삶들이 혼재해 있으며 역동적인 힘이 있다. “이들이 거주하는 골목은 활기가 넘친다. 사람의 욕구가 살아 있고 잠재해 있는 희망이 있다.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리 쳐 넣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 그곳에는 복잡함, 뒤얽힘, 무질서, 실수와 실망이 한데 엉켜 있다.”
네팔 작가 나라얀 와글레는 “골목들은 결국 우리의 옛날을 보여주는 족보”라는 성찰을 글 속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골목이라는 공통 화두를 가지고 함께 의견을 나누고 아직 가보지 못한 아시아의 골목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또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아시아 문학의 주요 흐름을 확인한 것도 중요한 결실이다.
골목들은 과거와 전통을 간직하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통로로 변화를 이끌기도 하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웃 마을로 마실을 가려면 골목 하나 지날 때마다 통행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 차라리 포기하고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막힌 삶을 들으며 그래도 어렸을 적 가난했지만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이웃집, 급하면 달려가 돈과 연탄과 반찬 등을 융통할 수 있었던 골목에서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그 시간들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골목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시간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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