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법 방희선 판사의 전화였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곧 판사실로 찾아갔다. 동료 판사와 함께 쓰던 방이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방 판사가 일어섰다. ‘다른 곳으로 가자.’ 동료 판사가 없어야 말할 수 있는 듯했다. 인접한 검찰청 구내매점으로 옮겼다. 방 판사가 말했다. “내가 재임용에 탈락했다고 한다.” 급한 대로 매점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구입해 촬영했다. ‘방 판사 재임용 탈락 단독 인터뷰’라는 이상한 특종이 그렇게 작성됐다. ▶시국 사범 구속 영장 기각으로 정권에 눈에 찍힌 판사였다. 그에게 대법원이 내린 퇴출 명령이었다.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법원장이 ‘당신에게 재임용 탈락이 결정됐다’고 통고한 게 전부다. ‘소명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그런 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더 무서운 건 법원의 ‘단합’이다. 동료 판사 누구도 그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퇴임식? 그런 건 꿈도 못 꿨다. 그 순간부터 ‘방 판사 재임용 탈락’은 수원지법 판사들에게 금기어가 됐다. ▶1997년 3월 18일이다. 그 시절 법원이란 곳이 그랬다. 독재 권력의 횡포에 대한 판단은 각기 다를 수 있다. 방 판사의 진보적 견해에 동의하는 판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판사의 머릿속에만 있어야 했다. 대법원 결정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료였던 방 판사가 쓸쓸히 짐을 싸도, 마지막 인터뷰를 매점으로 쫓겨나가 진행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세상이 변했고 법원도 변했다. 중요 사건에 대한 판사 개인 의견이 거침없이 공개된다. 동료 판사의 판결을 당당히 지적하기도 한다. 대법원장의 처신을 대놓고 비난하기도 한다. 아예 ‘대법원 판례의 구속력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굳이 평가한다면 지금이 옳다. 법관은 스스로 판단한다. 법과 양심이 유일한 판단기준이다. 대법원 입장, 선배 판사들의 결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지극히 독립적이어야 할 판사가, 세상 없이 폐쇄된 조직에 사로잡혀 살았던 ‘그 시절’이 문제다. ▶그런데 도를 넘는 듯 하다. 지금 판사들의 익명 게시판이 욕설과 비방으로 도배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도화선이다. 패거리, 개△△, ○뿌리는 인간들…. 저잣거리 패싸움과 다를 게 없다. 판사 내부 게시판이라지만 알 만한 국민이 다 알게 됐다. 판사들이 이렇게 가면 안 될 텐데, 큰일이다. 전체 판사 중 일부의 일탈이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판사 전용망에 접속한 판사 아닌 자의 분탕질이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걱정이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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