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씩 특별한 학생이 등교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쯤 커 보였다. 창문 밖에서도 교실 내부를 내려다볼 정도였다. 유독 예의가 발랐다. 선생님들은 학생을 ‘삼일의 자랑’이라고 불렀다. 1978년, 수원 삼일고(당시 삼일실업고)다. 학생 이름은 하동기, 농구 국가대표다. 2m5㎝로 당시 최장신 센터다. 참 가난했던 모양이다. 쌀이 없어서 감자를 한 솥씩 삶아 먹었다고 한다. 그런 학생을 국가대표로 키운 게 삼일고다. ▶삼일고의 투자는 25년 뒤 꽃을 피웠다. 2003년 22게임 전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양희종 선수가 있었고, 정승원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 하동기 선수의 아들 하승진 선수가 있었다. 2m20㎝의 키에 순발력까지 갖춘 대어(大魚)였다. 내로라하는 농구 명문 학교들이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하승진의 선택은 삼일중-삼일고였다. 가난했던 아버지를 키웠던 ‘삼일’을 숙명처럼 택했다. 대(代)를 잇는 신뢰, 이것이 삼일고 농구부의 힘이다. ▶1978년. 얼굴이 검게 탄 학생 몇이 있었다. 오전 수업 이후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는 시간까지 운동했다. 테니스부 학생들이다. 테니스가 사치 운동이라 여겨지던 시절이다. 라켓 하나쯤 들고 다니면 ‘폼’ 나던 시절이다. 그만큼 투자가 필요했다. 삼일고가 그런 테니스부를 운영했다. 4면짜리 테니스장도 구비했다. 라켓, 볼에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국 대회에서 큰 성적을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삼일고는 테니스부에 계속 투자했다. ▶그렇게 키워진 학생이 ‘일’을 냈다.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를 꺾었다. 한국 테니스 역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 8강에 올랐다. 40년도 훨씬 넘는 긴 세월을 기다린 결과다. 지역 언론의 1면이 약속처럼 닮았다. 주먹을 불끈 쥔 테니스 선수의 사진, 그리고 ‘수원의 아들 정현’이라는 제목. 정현(22)도 삼일고 출신이다. 수원 북중에서 자란 보석을 삼일고가 껴안아 키웠다. ‘아시아인은 안 된다’던 테니스에서 ‘삼일인은 된다’는 역사를 만들었다. ▶툭하면 없어지는 게 학교 운동부다. 성적 못 낸다고 없애고, 물의 일으킨다고 없앤다. 그래서 더 삼일고의 운동부 사랑이 돋보인다. 부자(父子)로 이어진 농구부 투자. 40년을 기다려온 테니스부 투자. 많이 지원해줘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언론 인터뷰에 남긴 김동수 교장의 말이다. “체육관 귀퉁이에서 연습하는 태권도부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운동장 빌려 쓰는 축구부 아이들도 눈에 밟힌다”. 88년에 지어진 체육관을 30년째 그대로 쓰고 있는 삼일고 선수들이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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