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건강할 때 지키는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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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계속되는 맹추위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꼭 한파 때문은 아니겠으나 연말연시 때면 회자되곤 하던 훈훈한 미담도 예전 같질 않고, 필자와 더불어 종단정화(宗團淨化)의 선봉에 섰던 스님들도 기차 앞 칸에 머물던 햇살이 뒷 칸으로 슬쩍 옮겨 가듯 내 곁을 떠나갔다.

 

혹한 속에 한 해가 저물어 가던 몇 해 전, 특별한 분이 생명나눔실천본부에 찾아왔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회원님이었는데,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1억 원의 고액 기부금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필자 또한 간이식 수술로 새 생명을 얻은 한 사람으로 그 마음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필자는 2000년 1월 8일,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문턱까지 간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것에도, 죽는 것에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저승에 가면 언제 죽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간을 보니 밤 10시 5분. 그 뒤로는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시각이 새벽 2시쯤. 어디선가 염불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평소 내가 잘 아는 염불 잘 하시는 스님의 음성이었다.

 

수술 후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이었지만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죽었길래 저 스님이 오셔서 염불을 할까’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가만히 염불을 따라 하고 있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마도 내 일생 가운데 가장 깊고 간절한 염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깨어나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지나다, 내가 ‘간 이식수술’ 받은 날 누가 죽어 영안실에서 염불을 했냐고 간호사에게 물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며 더군다나 영안실에서 나는 소리가 중환자실까지 들릴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그렇게 세상 밖으로 다시 살아나왔다. 그렇게 나온 세상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감사하기만 했고, 내가 숨 쉬는 공기, 내가 바라보는 모든 세상이 고맙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청년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아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었다. 그 당시 장기기증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이생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그 은덕을 갚으리라는 서원을 세우고 생명나눔실천운동에 진력해오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건강할 때, 건강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건강이 비켜가고 나서야 건강한 삶과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뒤늦게 알게 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한 삶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생명나눔을 통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고자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뜻이 바르게 잘 반영되기 위해서라도 건강은 지켜져야 한다. 사후나 뇌사 시 실제로 장기기증을 할 때는 스스로의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대 선사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혜국스님(충주 석종사 조실)은 건강하고 쓸모 있는 눈을 남에게 주기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눈 운동을 한다고 하니, 생명나눔을 실천하고자 스스로를 돌보는 스님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다.

 

우리 격언에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며,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진부한 얘기 같지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말인지를 실감케 한다. 봄의 길목 입춘이 코앞이다. 이제 2000년 이후 가장 춥다는 한파도 그 위세가 점점 꺾여 갈 것이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지 않도록,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는 지혜로움을 발휘하시길 바라며, 모든 이들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해본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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