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마저절위(磨杵絶葦)와 상주사심(常住死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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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연하장을 정리하다 보니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글자 아래 동백꽃을 배경으로 백구 두 마리가 놀고 있는 그림이 눈에 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작침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시선 이백이 어린 시절 공부하기 싫어서 스승 몰래 산을 내려오다가 한 할머니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뭐 하러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겠다고 했다. 중간에 그만두지만 않으면 언젠가 바늘이 될 수 있다고. 이백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산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어릴 적에 이 한자성어를 듣고는 ‘왜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까? 처음부터 도끼는 도끼로, 바늘은 바늘로 쓰임새가 다른 것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역시 산이 있어 불편하면 다른 데 가서 살면 될텐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노력과 의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살아오면서 많이 봐왔다.

 

마부작침과 비슷한 글귀를 얼마 전 심우장에서 만났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은 승려이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1919년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했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일반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분이다.

 

만해가 사용하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남아 있는데 ‘마저절위(磨杵絶葦)’라는 그의 글씨를 거기서 만났다. 절굿공이를 갈아서 갈대를 끊는다는 의미일까? 혹자는 이 사자성어를 마부작침과 위편삼절(韋編三絶)이 합쳐진 것으로 보아 ‘절굿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고 가죽끈이 닳고 닳아 끊어지도록 책을 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한자 ‘위’의 모양이 다른 걸로 보아 만해가 만든 사자성어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韋를 葦로 잘못 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쉬지 않고 정진한다는 뜻이니 깨달음을 얻는 과정인 심우(尋牛)와 통하는 면이 있다.

 

한자성어를 생각하다 보니 또 하나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상주사심(常住死心).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시인의 서재에서 인상 깊게 봤던, 액자 속 글귀였다. 지금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김수영 문학관에 그 액자가 걸려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해석도 구구하다.

김수영 시인이 하이데거 전집을 탐독했고 하이데거에 심취한 적이 있으므로 나는 하이데거 식으로 해석해 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본래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죽음이 면전에 있음을 의식하고, 선구적인 결단을 통해서 본래적인 ‘자신’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비치는 삶, 그것이 존재의 참된 본질이라고…. 김수영 시인의 ‘상주사심’은 이러한 생각을 표현한 게 아닐까.

 

뛰어난 분들의 좌우명에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내용뿐 아니라 인생관, 세계관 등이 담겨 있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올해는 31 운동 99주년이 되는 해이자 김수영 50주기가 되는 해다. 한용운과 김수영. 한국현대문학사 뿐만 아니라 사상사에서도 우뚝 서 있는 두 거인과 그들의 좌우명을 떠올리며 자신의 목표를 정해 정진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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