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동독 주민들 사이에 여행 자유화에 대한 요구가 비등했다.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불법 탈출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동독 정부가 기존의 여행자유화법을 개정했다. 여행 규제를 다소 완화하는 정도였다. 이 개정안을 발표한 사람이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선전담당 비서 귄터 샤보브스키다. 전 세계 TV가 중계하던 발표 현장에서 기자 한 명이 ‘언제부터냐’고 물었다. 내용 파악이 부족했던 샤보브스키는 서류를 뒤척이다가 한마디 했다. ‘바로(sofort)’.
그 순간 동독 주민들이 차를 몰고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지 못했던 초병들이 막아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수십년을 지켜왔던 장벽은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그게 1989년 11월9일이다. 독일 통일의 비화처럼 전해지는 얘기다. 하지만, 실제로 장벽 붕괴를 초래했던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후 사람들은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예기치 않았던 일로 통일이 올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도 여기 있다. ‘도둑 같은 사건’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권유로 군사 분계선을 한 발짝 넘어서던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런 가능성을 봤다. 언제든 역사적 전환점은 도둑처럼 마련될 수 있다. 그래서 상호 교류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차원의 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간도 오가고, 문화도 오가고, 학문도 오가야 한다. 차분하게 교류의 폭과 대상을 정리해나갈 필요가 있다.
2000년 6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만났다. 평양 순항공항에서 이뤄진 환영 행사는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곧 통일이 되는 듯 모두가 흥분했다. 하지만, 첫 번째 정상회담의 결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육로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 역시 김정일 전 위원장은 ‘하루 더 묵고 가라’며 환대했다. 그때도 흥분했지만 얻어진 결실은 없었다. ‘깜짝 놀랄 환대’와 ‘실망스런 결과’가 똑같이 닮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관련된 말을 했다. “기대하시는 분들도 많고, 또 지난 시기처럼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그게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면 그게 오히려 이런 만남을 가지고도 좋은 결과가 좋게 발전하지 못하면 기대를 품었던 분들한테 오히려 낙심을 주지 않겠나”. 그가 말한 ‘지난 시기’는 앞선 두 번의 정상회담이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는 취지로 들린다. 옳은 말 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이 북핵에 있음도 알 것이다. 이번에는 약속을 지키는 북한이 되라.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