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국 사회에 문화라는 단어가 아주 저급하게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있다. 소위 ‘갑질문화’라는 표현인데, ‘갑질’이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하고 있다는 부끄러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갑질’이란 한국어사전에 없는 신조어다. ‘갑’은 계약서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을’과 함께 계약당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약을 할 때 계약당사자들이 처음에만 사람 혹은 회사 이름을 언급하고, 나머지 내용은 A와 B, 혹은 ‘갑’과 ‘을’로 지칭하여 계약서를 작성한다. ‘갑질’은 계약 당사자 중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생각하는 ‘갑’의 억압적이고 인격모독적인 행위를 빗댄 표현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법 인식을 갖고 있는 시민사회다. 세계사적으로 시민사회의 출현은 절대주의 왕정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근거한 해방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계급사회의 신분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의 자유의사에 기인한 계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계약이란 ‘갑’이든 ‘을’이든 계약 당사자들이 정해진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계약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런데 계약관계를 상하관계로 인식하고 횡포를 부리는 소위 ‘갑질’은 계급사회에서 볼 수 있는 신분제도의 추한 모습이다. 직급이나 연공서열, 그리고 소속 등을 서열화하여 매사에 모든 관계를 위아래로 구분지어 나보다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서비스업에서 고객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사물존칭까지 사용하는 한국어 존대법의 뒤틀림은 씁쓸하기까지 하다.
‘갑질’이란 갑과 을의 관계를 계약 당사자와의 관계로만 이해하지 않고 종속관계로 이해하는 미성숙한 시민사회의 현상이다. 오늘날 이러한 ‘갑질’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약에 정해진 관계를 넘어선 ‘갑질의 횡포’에 대항하여 공정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갑질’은 문화가 아니다. ‘갑질’은 미성숙한 인간과 사회의 병리적 현상일 뿐이다. 병은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잘못된 현상은 고쳐야 한다. 한국 사회의 의식구조상 ‘갑질’은 만성질환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으면서 그 뿌리도 매우 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하나씩 고쳐 나간다면 더불어 사는 보다 건강한 시민사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임봉대 인천시 박물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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