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A씨는 재판에서 성폭행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를 무죄로 이끈 것은 엘리베이터에 달린 CCTV 동영상이었다. 그 사진은 A씨와 성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한 여성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장면.
그런데 성폭행을 당했다는 그 여성이 A씨 앞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A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무심코 타고 내리는 작은 공간 엘리베이터에도 CCTV가 설치돼 있었다니… 그리하여 24시간 감시가 이루어지고 살아있는 증인 역할을 한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직장인의 경우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활동을 하고 퇴근할 때까지, 하루 평균 20~30회 CCTV에 찍힌다고 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어쩔 수없이 감시의 포로가 되어 있는 셈이다.
CCTV뿐 아니라 자동차의 블랙박스, 휴대폰 같은 것도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기업체에서는 임원회의 때 아예 휴대폰을 갖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회의내용이 녹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스스로 메모하는 수첩 아닐까?
메모하는 습관은 예로부터 많이 권장돼 왔다. 특히 일본인들의 메모 습관은 유별나다.
1985영 8월 2일 승객 524명을 태운 일본항공 (JAL) 보잉 747점보 여객기가 도쿄에서 오사카로 비행하다 산속에 추락, 520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큰 충격을 주었었다.
사고 규모가 워낙 커서 충격도 컸지만 희생된 탑승객들이 남긴 유서와 메모 같은 것이 많이 발견돼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미찌꼬!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사랑하오.”
“아들아, 엄마를 부탁한다.”
이런 유서가 있는가 하면, ‘지금 엔진에 불길이 솟았다. 기체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등의 사고 진행 상황을 메모로 남기기도 했다.
이 정도면 일본인들의 기록열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들어 메모가 호랑이처럼 무서운 것이 되고 있다.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면 치매도 예방한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자신과 조직을 파멸로 이끄는 폭탄이 되기도 하고 법정에서는 교도소로 가는 저승사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의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수첩과 안종범 수석의 수첩은 사초(史草) 역할을 했다고 할 만큼 파괴력이 컸고, 이필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남겨진 메모는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이 전 회장의 메모는 그야말로 현미경 메모다. 지난달 서울 중앙지법형사합의 27부 심리로 열린 MB의 특정경제 가중처벌 등에 관한 공판에서 이 전 회장의 메모가 공개됐는데 22억5천만원의 뇌물 전달 과정, 방법이 소상하게 기록된 것.
‘통의동 사무실에서 MB 만남. 국회의원까지 얘기했음. 긍정방향으로 조금 기다리라고 함’
심지어 그날 MB와 함께 마신 차의 종류도 적혀있고, 처음 그의 청탁이 이루어지지 않자 ‘배신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메모는 선의의 기록이 아니라 양날의 칼이다. 언제 흉기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CCTV, 휴대폰, 메모도 모두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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