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이지만 일본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경찰권 위탁을 요구했을 때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10년 한ㆍ일합방을 추진하기 앞서 경찰권을 장악할 필요성에 따라 친일 내각수반 이완용에게 경찰권 위탁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1909년 12월22일 독립열사 이재명의 칼을 맞고 충남 온양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일본 통감부는 1910년 6월23일 요양 중인 이완용에게 사람을 보내 경찰권을 위탁하는 문서에 서명을 받아 오도록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가 거절하자 일본은 데라우찌 통감의 위력을 빌어 겁박하는 전보를 보내는 등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이완용은 1910년 6월 24일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친일 내각은 즉시 이를 의결, 오후 8시 우리의 경찰권은 일본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 후 두 달 만인 8월29일 한ㆍ일합방을 강행한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우리의 경찰권에 집착한 것도 바로 한ㆍ일합방 과정에 일어날 국민 저항을 그들 손으로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찰은 군과 함께 주권국가의 체제를 수호하는 힘이다.
그것은 곧 주권의 모체인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경찰의 처지를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달 22일 유성기업 임원에 대한 노조원들의 집단폭행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태도에 여ㆍ야를 떠나 개탄의 소리가 높다.
국민의 한 사람이 집단폭행을 당하고 있는데도 경찰의 공권력은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관이나 윗분들은 ‘법질서와 공권력을 엄정하게 확립하라’ 고 지당한 지시를 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막상 일선 경찰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마디로 위에서는 원론적인 말을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자칫 ‘내 신상만 망가질 수 있다’는 현실론 때문이 아닐까?
지난 9월 서울 동대문 경찰서 용산지구대 소속 홍모 경감이 정복을 입은 채 경찰청사 앞에서 행한 1인 시위. 그는 경찰이 한 시위대에 청구했던 손해배상을 포기한 데 대한 항의를 한 것이다. 문제의 시위 때문에 경찰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고, 경찰 버스에 불을 붙이는가 하면 줄로 묶어 끌어내는 사태까지 있었는데도 손해배상을 포기하라니 공권력을 집행하는 일선 경찰관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것.
손해배상 포기만이 아니다.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거꾸로 시위대에 배상을 해야하고, 때로는 직권남용 등으로 피소되어 경찰복을 벗어야 한다. 피소된 시위자들은 법원의 무죄 판결로 경찰만 헛발질한 꼴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위에서 ‘엄정한 공권력 집행’을 강조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몸을 던질 경찰관이 얼마나 될까?
과거 우리 경찰은 권력에 흔들리고 영혼이 없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유신정권 시절, 안동의 한 경찰관은 서울 명동성당의 시국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신부를 추적하여 저지시킨 공로로 1계급 특진을 한 일이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 지금의 우리 국민 눈높이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이 과거에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우리 경찰이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공권력 행사에 눈치 보는 일이 있어야 되겠는가. 경찰에 대한 신뢰의 척도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라 믿는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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