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군 역사상 최연소 참모총장은 정일권.
그는 약관 32세에 육군 뿐 아니라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총참모장이었다.
정일권 참모총장의 취임식은 당시 피란정부가 와있던 충남도청 회의실에서 있었다. 그는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한국전선에 맨 먼저 파견된 미24사단장 딘 장군과 함께 전방으로 달려갔다.
긴박하고 숨 가빴던 시절, 철모에 그려진 장군 계급 ‘별’은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이후 세월이 가면서 ‘별’은 수없이 늘어났고 때로는 그 ‘별’들이 정치에 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리의 대상이 되는 등 영욕을 거듭했지만 그러나 그 ‘별’들이 있어 국가를 부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흘러간 많은 별들 중에 특별히 내가 존경하는 장군이 있다.
채명신(蔡命新). 그는 육군 보병소위로 6·25를 맞으면서 줄곧 최전방에서 싸웠으며 그가 받은 훈장이 28개나 되어 ‘전신(戰神)’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전공을 세웠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월남파병을 추진하자 채명신 장군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도 박 전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하고 그를 주월사령관으로 임명하자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들여 3년 8개월간 월남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는 잠깐 귀국하게 되면 청와대로 가서 신고를 하기 전 동작동 국군묘지에 달려가서 거수경례를 하며 앞서간 부하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 모습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박대통령 측근들은 ‘채명신이 대권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69년 4월 주월군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는데 그때도 역시 국립묘지부터 달려갔고 그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1972년 유신헌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등 계속 갈등을 빚었다.
이 때문에 채명신은 1972년 5월 대장승진 심사에서 탈락의 고비를 마시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외국대사로 나가 있다가 2013년 11월 25일 88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의 군인으로서의 정신은 죽어서 더욱 빛났다.
당연히 장군묘역에 묻힐 권리가 있고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릴 수 있는데도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과 생사를 함께 했던 사병묘역에 묻혀 달라고 유언을 한 것이다.
정부는 그가 남긴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며 장군묘역 안장을 권유했으나 결국 본인의 유언에 따라 월남파병 사병묘역에 안장했다. 우리 군 역사상 장군이 사병묘역에 묻힌 것도 처음이지만 사병묘역에 묻히려면 화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죽어 화장을 한 첫 장군이 되기도 했다.
연세대 김동길 명예교수는 한 언론에서 “채명신 장군은 죽지 않았다”며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한 말을 상기시켰다.
요즘 육군참모총장이 청와대 4급 행정관과 집무실도 아닌 동네 카페에서 만나 군인사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 보도되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별 둘을 달고도 위급한 전선을 지휘했던 선배 참모총장, 별 넷을 달지 못하고 별 셋으로 예편했음에도 존경을 받았던 채명신 장군이 오늘 별 넷의 참모총장 처신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국가 간성의 꿈을 안고 오늘도 사관학교 연병장을 뛰는 젊은 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별은 빛나야하고 그 빛은 자존심이요 명예가 되어야한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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