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冊 ‘이방인’ 속의 ‘1942년 재판정’

억압·소외·왜곡된 소설 속 재판정
사법개혁 외치는 이 시대와 다른가

…판사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이분께 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고통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가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의 말을 수긍하는 체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의기양양해서, “그것 봐, 그것 보라고. 너도 믿고 있잖아? 하느님께 너 자신을 맡기려는 거잖아?”라고 말했다…

2019년, 변협이 판사를 평가했다. 고압적인 태도가 문제 됐다. 소송 대리인이 증거 신청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판사가 기각했다. 그리고 막말을 했다. “불만이 있느냐. 왜 재판부를 쳐다보냐.” 소송 대리인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한참 재판을 중단하고 노려봤다. 다른 판사는 사건의 쟁점도 파악하지 않고 들어왔다가 엉뚱한 말싸움으로 사건 당사자와 언쟁을 벌였다. ‘1942년 재판정’처럼 판사가 막말한다.

…때로는 나도 한 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가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피고인입니까. 피고인이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2019년, 이런 경험담이 전해진다. 간단한-적어도 피고인 판단에는- 사건이었다.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았다. 돈도 없었다. 직접 심문하려고 증인을 불렀다. 시작에 앞서, 판사가 호통쳤다. “왜 심문 사항을 미리 내지 않았느냐”. 모욕도 당했다. “자료 보지 말고 해라, 서로 짜지 말고”. 피고인이 직접 해보려던 자기변호다. 판사의 압박 앞에 결국 심문은 뒤죽박죽이 됐다. ‘1942년 재판정’처럼 재판을 직접하기는 어렵다.

…양로원에 넣은 것에 대해 엄마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더냐고 재판장이 묻자, 원장은 그렇다고 했다. 내가 (엄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페레스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검사가 마리에게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었냐고 물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 날인 것 같다고 했다. 검사가 말했다. “어머니 사망 다음 날, 정사에 골몰했던 사람이 치정을 덮으려고 한 살인입니다”…

2019년, 여론이 재판을 한다. 검찰은 필요한 증언만 모은다. 그 증언을 연결해 결론을 낸다. 언론은 그 결론을 받아서 단정 짓는다. 이걸 끊어 줄 곳이 법원이다. 논리의 억지, 여론의 선입견을 잘라줘야 한다. 하지만, 못한다. 신상 털려 협박 당하기 일쑤다. 결국, 그 압박에 굴복한다. 영장 발부ㆍ기각, 판결 유죄ㆍ무죄가 다 여론대로 간다. 재판은 그저 여론에 서명하는 절차일 뿐이다. ‘1942년 재판정’도 이렇게 여론재판이었다.

…변호사가 따라와서 말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몇 년 동안의 금고나 혹은 징역만 살면 그만일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피고석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로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나는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나에게 이상스러운 말로,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간수들이 부드럽게 대해줬다…

2019년, 재판장이 여러 번 합의를 권했다. 원하는 액수를 구체적으로 묻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판결에 대한 대략적 방향이었다. 변호사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결과가 달랐다. 피고가 완패했다. 논리는 문제가 없었다. 재판장이 사건을 파악 못 하고 진행해온 탓이다. 합의할 의향을 묻는 재판장 질문에 매번 ‘네’라며 따라왔던 피고다. 난데없이 닥친 완패라는 결론이다. ‘1942년 재판정’의 사형선고만큼이나 느닷없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노벨상 작가임은 중요하지 않다. 책을 쓴 1942년 법정과 이 글을 쓰는 2019년 법정이 달라지지 않았음이 중요하다.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이 칼을 빼들자 총을 쐈다. 방어 행위였다. 하지만, 고의적이고 흉악하고 부도덕한 살인자로 몰렸다. 억압되고, 소외되고, 왜곡된 법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 세계에서 뫼르소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독백뿐이다. “이 심장 소리는 곧 내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전(前) 대법원장이 구치소에 갔다. 누구는 개혁으로 가는 것이라 하고, 누구는 개악으로 가는 것이라 한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인가. 답답함에 꺼내 든 책, ‘이방인’(L’trange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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