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妓生)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호칭이다. 주로 잔치나 술자리에 등장한다. 노래·춤 등으로 여흥을 돕는다. 다른 말로 ‘예기(藝妓)’라고도 한다. 난(蘭)을 쳤고, 시조(時調)도 읊었다. 조선 시대까지는 그랬다. 일제를 거치면서 이게 바뀐다. ‘몸 파는 여자’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비인간적 위생검사가 결정적 계기였다. 마당에 쳐진 칸막이에서 이뤄졌다. 옷을 벗기고 성기를 노출시켰다. 기생을 떠나 조선 여성에 대한 일제의 인권 침탈이었다. ▶김향화(金香花ㆍ1897년~미상)도 기생이다. 1919년 2월 25일 분가했다. 주소지는 수원읍 남수리 201번지다. 23살 되던 해 고종이 승하했다. 독살설이 꼬리를 물었다. 1월 27일, 장례식이 있었다. 그가 기생 동기 20여명과 수원역으로 갔다. 모두 하얀 소복 차림이었다. 기차를 타고 한양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장례식이 거행된 덕수궁이다. 문 앞에 수많은 백성이 모여 있었다. 그와 일행은 그들과 함께 곡(哭)을 했다. ▶3월 16일, 수원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27일에는 수원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도 동참을 결심했다. 때마침 3월 29일이 위생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수원기생 33인과 함께 나섰다. 자혜병원으로 가는 길에 경찰서가 있었다. 경찰서 앞에 이르자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나약한 기생들을 무참히 폭행했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합세했다. 시위가 커졌고 수원 만세 운동의 획을 그었다. ▶2개월간 고문받았다. 그래도 만세를 불렀다. 수원지청 분국으로 넘겨졌다.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그해 3월은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다. 일일이 보도하기에도 벅찼을 것이다. 그 속에서 ‘기생 김향화’의 만세운동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36년 6월 21일 자 매일신보가 이렇게 적고 있다. “수원기생 김향화는 태극기를 들고 여러 기생을 데리고 경찰서 문앞에서 만세를 불렀다…징역 8개월을 선고한바…방청석에 사람이 가득하였다.” ▶1925년 수원예기조합 명단엔 그가 없다. 출소 후 기생 생활을 계속 할 수 없었던 듯하다. 1934년 우순(祐純)으로 개명한다. 더는 김향화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1935년 수원을 떠났다. 그가 남긴 흔적의 끝이다. 생계 때문에 기생의 길을 택했던 여인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여성 인권 침해에 몸으로 맞섰던 여인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인이다. 그가 떠나고 84년, 수원시청 현관에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 ‘수원을 빛낸 위인’ 헌액 동판이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마지막은 ‘미상(?)’이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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