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가축 살처분 트라우마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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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같은 가축 전염병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구제역은 발굽이 2개인 소·돼지 등의 우제류에 발생하는 전염병이고, AI는 닭이나 오리 같은 가금류 또는 야생조류에서 생기는 바이러스의 하나다. 구제역과 AI는 2000년 이후 거의 매년 발생해 한해 적게는 수백만, 많게는 수천만마리의 가축이 죽는다.

정부는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병에 걸린 가축과 함께 주변의 멀쩡한 가축도 살처분한다. 감염 농가 주변의 가축을 죽이는 ‘예방적 살처분(殺處分)’ 정책 때문이다. 전염병이 잦아질수록 정부는 예방적 살처분 범위를 넓혔다. 2011년 반경 500m였던 예방적 살처분 범위는 2016년 3㎞까지 확대됐다. 예방적 살처분 범위가 넓어질수록 죽임을 당하는 가축이 늘었다.

2000년대 들어 살처분된 가축은 모두 9천806만마리에 이른다. 매년 평균 500만마리 이상이 죽임을 당한다. 죽어야 하는 가축 건너편엔 이를 죽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 ‘살처분 노동자’들이다. 초기엔 공무원, 군인, 소방관 등이 동원됐지만 이제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다. 지자체들이 전문 방역업체나 용역업체에 살처분 작업을 위탁하는데 용역업체에선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살처분은 살아있는 동물을 안락사 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오리나 닭은 비닐을 덮어 밀폐한 뒤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는 방식을 택한다. 소나 돼지는 근육이완제나 이산화탄소 주입 방식을 병행한다. 예전엔 파놓은 구덩이에 그대로 내던지고 생석회를 뿌리고 매장하는 사례가 많았다.

죽어가는 동물들도 고통스럽겠지만, 이 동물들을 죽여야 하는 사람들 역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대량 학살’의 경험은 살처분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국가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해왔다. 노동자들은 살처분 과정이 자꾸 떠올라 괴로워하거나 학살에 동참했다는 죄책감 등에 시달리고 있다. 2017년 인권위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 의뢰해 가축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과 공중방역 수의사 268명의 심리건강 상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판정 기준을 넘겼다. 중증 우울증이 의심되는 응답자도 23.1%에 달했다. 자살한 사례도 있다. 이에 인권위가 살처분 참여자가 겪는 트라우마의 심각성와 심리지원 문제를 제기하며 정부 대책을 권고했다.

좀 늦었지만 정부가 살처분 작업자에 대한 심리지원 방안을 강화하는 등 관련 제도를 정비하기로 했다. 트라우마 치료비도 국가가 부담한다는 계획이다. 심리적 안정·정신적 회복을 위한 치료와 지원, 정부가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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