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수단’ 인감제·도내 지명 등 사회 곳곳 파고들어
국가적 장기 교육정책 마련돼야
3ㆍ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독립투사들의 노고와 이들이 투쟁한 장소를 알리는 등 적극적인 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일제 잔재에 대한 해결방안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운요호 사건으로 빚어진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국내에 유입된 일제 문화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암약해 올바른 언어생활을 해치고 국적이 불분명한 풍습을 양산해냈다고 지적한다. 이에 본보는 약 150년 간 우리 사회에 파고들어 언어와 풍습 등 문화 깊숙히 자리잡은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조명하고, 이를 뿌리뽑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대안을 제시해본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사장 용어 중 대다수가 일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대학생 박기형씨(26ㆍ평택)는 겨울 방학을 맞아 지난 두 달간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어를 익히느라 애를 먹었다. 막일꾼을 칭하는 용어 ‘노가다’는 물론 기스(흠집), 공구리(콘크리트) 등의 현장 용어가 일본어에서 파생됐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나라시(평탄화 작업), 와꾸(틀) 등은 생소했기 때문이다.
3ㆍ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일상 속에 남아있는 일본식 용어와 풍습이 많아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더욱이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에서 언어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한 선조들의 노고가 재조명돼 일제 잔재 타파 여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우선 문학계에서는 소공녀, 춘희 등 과거 일본을 거쳐 수입된 외국 동화의 원제가 각각 ‘A Little Princess’(어린 공주), ‘La Dame aux camelias’(동백의 여인) 임에도 여전히 일본식 번역체 제목을 쓰고 있다.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도 유치원은 독일어인 ‘Kindergarten’(어린이들의 정원)을 일본식 번역체로 명명한 일제 잔재로 여겨지며, 어린아이들의 놀이인 ‘쎄쎄쎄’도 ‘손을 마주대다’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 ‘셋스루’에서 생겨난 놀이로 알려져 있다.
지명과 관행에도 일제 잔재가 남아있다. 25일 한국땅이름학회 등에 따르면 일본강점기 당시 행정구역 중 면은 1천338개에서 2천521개로 늘어난 반면 군은 377개에서 220개로, 리는 6만 2천532개에서 2만 8천366개로 줄어 들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앞세워 조선의 땅을 조사하고 행정구역 폐합 정리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은 경기지역에 1만 1천여 개의 고유지명을 없애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명했다.
신구대조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인감에 따르면 경기도는 히가키 나오스케 조선총독부 경기도 장관이 1914년 4월1일 군면 통폐합에 나섰다. 이때 통폐합으로 ‘양지현’이 ‘용인군 양지면’과 ‘안성군’으로 나뉘어 현재의 용인시와 안성시로 굳어졌다. 아울러 현재의 분당 부지도 장터(盆店ㆍ분점)와 당모루(堂隅里ㆍ당우리)를 억지로 합쳐 앞글자만 따 분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폐합했다. 또 인천의 송도도 러일전쟁 당시 침몰한 일본의 마쓰시마(松島ㆍ송도)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해 현재도 송도신도시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아울러 인감제도도 1914년 시행된 제도로, 인감으로 신고하지 않을 경우 토지를 국유화하는 토지수탈 작업과 전쟁동원 물자 조달을 쉽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일본과 대만은 인감제도가 등록제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사회 곳곳에서 인감이 필요한 실정으로 일제 잔재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3ㆍ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현재에도 우리 생활 속에 일제 잔재가 남아있는 원인으로, ‘인식 부족’을 지목했다. 단순히 생활 속에서 의미가 통한다는 이유로 어렸을 적부터 일본식 용어에 노출돼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사용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광복 이후 정책적 논의 없이 막연하게 생활 속에서 개선해야 할 문제로만 여긴 것이 원인”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국립국어원 등 기관을 통한 교육은 물론 장기적인 정책 수립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_권오탁기자 사진_경기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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