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3. 독립군·광복군 군사전략가 청사 조성환

조국 ‘완전자주독립의 꿈’ 물거품… 미완의 한반도

독립혁명가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 1875~1948)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이다. 청사의 생가는 경기도 여주 대신면 보통 1길 98에 위치한다. 청사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의 명문가였다. 이조판서와 한성판윤 등 주요 요직을 역임한 조윤대(曺允大, 1748~1813)를 비롯하여 당대를 대표할만한 선비들이 즐비했다.

청사의 생가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시계(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가 섬돌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다. 청사는 어릴 적부터 해시계를 보고 자라서인지 지금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또 시기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때(時)를 잘 알고 있었다. 청사는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일찍이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는 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방례초본 인)고 경고 했듯이 청사는 졸업을 앞둔 시점에 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무관학교를 고쳐보려고 앞장섰다. 결국 청사는 동맹 퇴학의 주동자(황성신문 1902년 1월 20일)로 15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고 유배를 가야만 했다. 이 여파로 계급은 있으나 직책이 없는 군인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당할 무렵 청사는 평양의 기명학교 교사로 활동한다. 1906년 안중근이 간도로 망명하기 바로 직전에 만난 인물이 다름 아닌 조성환이었다. 조성환은 안중근에게 첨서添書를 써준다.(이등공伊藤公 암살범 안응칠(중근)에 대한 조사 보고)

조성환은 1906년 10월 5일자 황성신문에 청사자해晴蓑自解라는 시詩를 기고한다. 청사라는 호號의 의미를 스스로 풀이한 시이다.

여름엔 베옷 겨울엔 갖옷이 각각 마땅하지만 夏葛冬?各適宜

맑게 갠 날 도롱이 삿갓도 서로 어울린다네 晴天?笠底相隨

강호의 본디 모습 원래 이와 같으니 江湖本色元如此

비바람 앞날을 알기 어려울세라 風雨前頭未可知

이슬 젖어 우거진 풀 언덕에 앉아 있으니 露濕坐因芳草岸

밝은 달은 푸른 버들가지에 걸려 있구나 月明掛在綠楊枝

사람들아 지금 소용이 없다고 웃지 마라 傍人莫笑今無用

예로부터 처신에는 저절로 때가 있으니 從古行藏自有時

맑게 갠 날 도롱이 삿갓을 왜 써야만 했을까? 비바람 칠지도 모르는 조국의 미래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성환은 나갈 것인지(行) 묻혀 살 것인지(藏)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황성신문은 “쓸모 있는 재능을 지니고도 위양에서 낚시를 드리운다”고 평했다. 강태공이 위양에서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으며 때를 기다렸듯이 조성환 역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을사조약(1905)으로 외교의 축은 이미 무너졌고, 군대도 해산(1907년)되어 버렸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다. 청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908년 독립기지 건설을 하라는 신민회의 명을 받들고 연해주에 가서 최재형과 독립기지 건설을 논의한 후 북경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지목한다. 거점을 마련한 청사는 1909년 2월 드디어 망명길에 오른다. 독립군의 불꽃이 되고자 이름도 조욱曺煜으로 바꾼다.

청사는 독립군의 통신원이 되어 도산 안창호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주지역의 동포들의 현황과 중국 신해혁명 상황 등을 속속들이 알린다. 신해혁명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무관학교 동기 신규식과 함께 상해에 가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을 간파하면서 늘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강구해야만 했다. 상해에서는 중국혁명세력과 교류할 기관으로 한인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동제사同濟社를 만든다. 그러다 북경에서 일본수상 가츠라桂太郞를 암살하려다 체포(매일신보 1912년 8월 15일자)되어 또 다시 10년 만에 거제도로 유배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국내에서 가두연설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민부 재무부장을 역임했던 일강一崗 최석호崔碩鎬(다른 이름 최문석崔文碩, 獨立鬪爭 自苦一生前末記, 독립기념관)는 광산에서 일하다 청사의 연설을 듣고 지금 광산에서 한가하게 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1915년 독립운동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이다.(최석호의 막내아들 최창화 증언)

망명 혁명가 조성환은 북경에서 “광무황제가 국권을 포기한 날은 우리 동지가 국권을 계승한 날이요” “4천년의 주권은 우리 동지가 상속”하였다는 대동단결선언(1917)의 주역이 된다. 뿐만 아니라 대한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는 대한독립선언서(1919)의 39명 대표 중 한명이 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핵심 요원으로 활약한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헌법을 통과시켜 대한제국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으로 탄생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의 군무차장에 이어 군무위원장으로서 임시정부의 군사문제를 책임졌다.

조성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민족 재생을 위해 무기를 휴대하고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방략을 모색한다. 외국인의 도움(독립운동자금모집자 검거의 건, 1919년 12월 13일자)도 필요했다. 그때 마침 블라디보스톡에 체코군이 도착하자 조성환은 대장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를 비밀리에 만나 막후교섭을 벌여 소총 1,200정,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발, 수류탄, 권총 등 무기를 대량 확보한다.(김희곤, 이범석 『우등불』) 조성환의 주도면밀한 협상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로써 조성환은 청산리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다. 조성환의 아버지 조병희 역시 독립에 대한 꿈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던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여주의 생가를 팔고야 말았다.

(위)조성환 생가 (아래)조성환 묘, 집터 표지, 해시계
(위)조성환 생가 (아래)조성환 묘, 집터 표지, 해시계

독립혁명가 조성환은 독립군을 지탱해 주는 동포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에도 매진한다. 대종교는 그 중심축에 있었다. 북경에서는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를 조직(1921)하였고 『부득이不得已』라는 신문도 부득이 발행했다.

남만주에서는 전만통일회의주비회에서 군사분과위원을 맡으며 남만주 독립혁명단체를 하나로 묶는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북만주에서도 신민부新民府가 탄생한다. 중앙집행위원장에 오석 김혁이 추대되고, 조성환은 외교부장을 맡는다. 이처럼 조성환은 독립혁명 조직을 그물망처럼 연계시키고 있었다. 이제는 각계 각파와 좌우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야 했다. 그것은 독립혁명조직을 통합하는 유일당 운동이었다.

독립혁명조직들을 연계하고 통합하는 전략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대 창설을 도모한다. 그는 임시정부 군무장으로서 군사특파단의 단장도 맡는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등의 조직은 군대창설을 위한 병력 모집을 주임무로 삼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드디어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 군대 해산 이후 33년 만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잇는 어엿한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것이다. 군대가 창설되자 1944년 10월 3일 국무회의에서는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기 위해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러나 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전에 광복은 느닷없이 도둑처럼 오고야 말았다.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청사 조성환은 조국의 독립과 반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온 정성과 정력을 다 쏟아 부었다. 해체된 군대를 다시 창설하기 위해, 동포사회의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 같고, 큰 용기는 겁먹은 것처럼” 불철주야 전 중국을 누비며 전 방위적으로 활약했다. 독립군의 줄기와 가지를 연계하고 통합하여 강한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조성환은 귀국하여 즐거워할 사이도 없이 다시 찬탁이니 반탁이니 하며 좌우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또 다시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청사晴蓑 조성환은 독립을 위해 탁월한 군사전략가로서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웠음에도 청사晴蓑의 이름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 혁명의 길을 걸으며 청사가 꿈꾸었던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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