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만세운동 농민 이정석 구금 도화선… 광명의 그날, 모두가 독립투사였다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또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시작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제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민국은 이처럼 민주와 공화라는 바탕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초가 된 것이 3·1 운동이고, 그 기틀이 된 곳이 바로 경기도라 할 수 있다.
광명에 자리 잡고 있는 온신초등학교에는 3ㆍ1 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교내에 있다. 이 기념비가 있는 온신초등학교는 광명지역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앞면에는 3ㆍ1 독립만세 광명지역 발상지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당시에 일어났던 일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온신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터는 원래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였다가 1934년 4월 1일에 서면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가 들어서게 되면서 학교부지가 됐다. 1947년에 현재의 이름인 온신국민학교로 정식 개교했다.
1919년 3월 27일 농민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선동하고 1인 시위를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다음 날 아침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죄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됐다. 이 소식을 들은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은 휴교령으로 집에 내려와 있던 배재고보생 최호천에게 자신의 아들을 구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호천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윤의병과 만나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고, 마을 주민들을 모았다.
윤의병과 최호천과 함께 주민 70여 명이 면사무소 부근에서 이정석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인근 가리대마을에서 100여 명이 합세해 200여 명의 인원이 모였는데, 이때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과 함께 농민 김거봉,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로 향했다. 주재소로 향하는 도중에 최호천은 곤봉이나 돌로 주민들에게 무장하도록 했고, 밤 10시경 구름산을 넘어 주재소에 가서 뭉둥이로 주재소를 부수고, 돌을 던졌다. 주재소에 있던 경찰과 담판을 해 이정석을 석방하려고 했으나 이미 이정석은 영등포 본서로 넘어갔음을 알고 다음날 본서에 가는 일본인 경찰에게 이정석의 신병 취하를 약속받았다. 이때 이종원은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 각서를 써 달라고 했고, 일본경찰은 “관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느냐”면서 “틀림없이 풀어주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돌아와 소하리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그러나 이정석을 풀어주기는커녕 다음날 경찰 병력을 동원해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유지호, 최정성, 기거봉, 최주환을 체포하고 구속했다.
최호천은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중간에 소요죄로 바뀌어 결국 1921년에 징역 2년으로 확정됐다. 1심은 궐석재판으로 진행된 걸로 보아 식민지 법정의 재판에 계속 항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의병은 당초 소요죄로 징역 1년 판결을 받았으나 고등법원에서 파기돼 대구와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징역 2년으로 확정 판결받았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과 최정성은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해 1919년 12월 벌금 30원으로 확정됐다. 이외에 유지호, 김인한, 최주환 등은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정석은 체포 이후 재판 기록이나 여타 기록이 없다. 3ㆍ1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룬 7인 중 최호천, 윤의병, 유지호, 최주환은 1990년 애족장을, 이종원은 1992년 대통령 표창을, 김거봉은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1919년 광명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는 바로 독립운동의 처음과 끝은 이 나라의 통합을 부르짓는 것이며,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첫걸음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잊지 않고, 다시 시작될 대한민국의 100년을 기약해 본다.
윤용한 화성 고정초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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