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 이승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켜켜이 누적된다. 오래된 가죽점퍼의 소매 끝이 반들반들해져 윤이 나는 건 시간이 쌓여서 그렇다. 고택의 대문 손잡이가 손때로 매끄러워 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윤기에는 사연이 묻어있다. 대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과 까닭으로 오가기 마련이다. 그 사연들의 누적을 묵묵히 증명하는 것이 대문의 손때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시간의 손때가 많이 묻어 자기만의 윤기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던 삶의 사연들에서 문득 ‘어떤’ 순간을 되돌아보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함일 것이다. 그 돌아봄은 늘 애틋하고 또 거짓말 같다. “그땐 그랬었지!”라고 옛일을 회상(回想)하는 것은 청춘의 한 시절을 지나 완숙함의 길목에 접어들 때쯤일 것이다.

이승희 시인의 시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는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붉게 핀 맨드라미 같았던 어떤 시절의 격렬함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에게나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의 찬란한 방황들. 한 생을 다 바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던 때의 꿈과 사랑과 좌절의 지독한 시절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 있었지”라는 말로 압축되는 게 삶의 순리인 듯하다. ‘폐인’처럼 중얼거리며 “오전과 오후의 거리”를 “이승과 저승의 거리”처럼, “딱 죽기 좋은 시간”처럼 배회하던 맨드라미 같은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완숙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최선을 다해” 울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최선의 울음으로 맨드라미의 붉은 꽃을 피워 올렸던 옛날, 그 때는 참 아름다웠다. 쓸데없어 보이는 일로 때로는 무모한 일로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을 건너왔던 맨드라미꽃 같은 청춘의 표정. 그것이 낭만이고 사랑이었다. 방황을 삶의 낭비로 생각하는 실용(實用)의 시대는 건조하고 삭막하다. 그 사막에 꽃을 피워줄 ‘환장’의 낭만이 절실한 시절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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