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주도로 시작된 ‘제주 4·3 기림 캠페인 비설’
진상 규명·희생자 추모 위해 굿즈 제작·판매
영상·마케팅 동아리도 합류… 40여명 힘 모아
수익금 전액은 제주 4·3 평화재단 기부 예정
■ ‘역사의 진실’ 기억하고 싶은 학생들
2019년 3월 어느 날, ‘우리는 현재다’ 팀과 함께하는 단체톡방에 학생이 기사글 하나를 공유했다. 여수ㆍ순천 사건 재심과 관련한 4ㆍ3특별법 개정·여순특별법 제정 촉구 기사글이었다. 이견이 분분했던 이 기사의 댓글들이 어떤 뜻인지를 모르겠다며, 도대체 이 사건은 무슨 사건이길래 누구는 어떻게 말하고 누구는 저떻게 말하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학생들에게 이 사건의 핵심은 배후세력이 어떤 성향인지가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대량으로 이뤄졌다는 데 있고, 그를 강조하기 위해 제주 4ㆍ3 평화공원의 ‘비설 모자상’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잘 알지 못했던 가슴 아픈 역사에 너 나 할 것 없이 분노하던 학생들은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기억하게 할 캠페인을 벌이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든 창의적 체험활동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 4ㆍ3 기림 캠페인 : 비설[飛雪:웡이자랑]’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우리는 현재다’ 팀은 방과후 수업이었던 ‘우리는 현재다’ 수업에서 결성된 팀이다. 2017~2018년 동안 3텀의 방과후 수업 활동을 통해 우리는 역사 독서 토론, 역사 소논문 작성, 역사 독후 발표 등 다양한 형태의 ‘역사하기 Doing History’를 함께 했다. 학생들은 어느덧 ‘우리의 현재가 곧 역사’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닌 역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됐다. 그러더니 올해 초, 새로운 창의적 체험활동 동아리를 만들고 싶다고 찾아왔다. 3학년이라 활동이 여의치 않은 자신들은 자율동아리 활동을 하며 서포트를 할 것이며 1, 2학년 학생들이 주축이 된 동아리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졸업하더라도, 우리가 현재임을 상기하고 역사를 이끌어나갈 후배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아리가 역사 실천 동아리 ‘HEAD’다. HEAD의 첫 활동이 바로 ‘비설 프로젝트’다.
■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위해 굿즈 제작판매
‘제주 4ㆍ3 기림 캠페인: 비설[飛雪:웡이자랑]’ 프로젝트는 제주 4ㆍ3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기리도록 하는 캠페인 활동으로 시작했다. 우선은 HEAD 내 회의를 통해 배지 판매 및 기부활동을 포함한 캠페인의 형태를 결정하고, 아이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어 디자인한 배지와 배경지를 이용한 굿즈를 만들었다. 굿즈는 두 종류의 배지를 제작했다. 하나는 제주 4ㆍ3을 상징하는 동백꽃을 형상화한 ‘동백 배지’, 또 다른 하나는 비설 모자상을 모티프로 한 ‘비설 배지’였다.
이제 굿즈를 제작했으니 실제 판매 및 기부 캠페인 활동으로 옮길 차례였다. 배지 디자인과 제작의 모든 진행은 ‘우리는 현재다’ 팀이 맡았기에, 배지 판매 기획과 캠페인 자체 운영은 1, 2학년 HEAD 학생들이 총괄했다. 캠페인은 전시회 형태로 진행됐는데, 1팀은 제주 4ㆍ3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2팀은 제주 4ㆍ3사건 당시의 참혹함, 3팀은 이후에도 지속되는 제주 4ㆍ3사건 피해의 현재를 전시물로 제작, 2주간 중앙 계단 학생들의 공간인 홈베이스에 게시했다. 아울러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동백나무 만들기 방명록을 비치하고, 그 중 3일 동안 배지를 판매하는 부스를 열었다.
아울러 배지 판매 부스와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서 다양한 동아리와의 협업 활동이 진행됐다.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영상 제작 자율 동아리인 ‘시나브로’ 학생들이 2편의 4ㆍ3사건 기림 영상과 홍보 영상을 제작해 도움을 주었고, 마케팅 자율 동아리인 ‘마커’는 제주 4ㆍ3사건과 배지의 의미를 알리는 카드 뉴스, 교내에 게시할 포스터를 만들어 홍보와 마케팅에 힘써주었다. 아울러 HEAD의 인터넷 홍보팀은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이를 업로드하고 공유했다. 총 40여 명의 은행고 학생들이 함께 한 거대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
모두가 잘 아는 사건도 아니었고, 수행 평가도 아니었으며, 강압적으로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학생들이 직접 알리고 싶어 했고, 또 알고 싶어 했다. 학생들 스스로 활동의 주제를 정하고, 활동을 기획하고, 또 많은 친구들과 협업해 실행해 나갔다.
■ 진정한 ‘성장’을 위해 공감실천한 은행고
배지 제작 및 캠페인 비용은 모두 학교의 동아리 예산의 지원을 받았다. 사실 학교의 큰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프로젝트였다. 학생들의 주도적인 활동은 이처럼 학교가 물심양면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덕분에 학생들의 뜻깊은 활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될 수 있었고 창출된 수익금 전액은 곧 ‘제주 4ㆍ3 평화재단’에 기부될 예정이다. ‘우리는 현재다’팀에서 시작해 동아리 HEAD가 주도했다. 또한 시나브로와 마커 등 제 역량을 발휘한 다양한 역할 전문가들이 협력한 은행고의 팀플이 이렇게 마무리됐다. 거의 한 학기를 진행해온 이 프로젝트는 사실 지금껏 학생들이 축적해온 배움, 경험, 성장, 가치 등을 종합하는 프로젝트였다.
‘제주 4ㆍ3 기림 캠페인: 비설[飛雪:웡이자랑]’ 프로젝트는 아주 작지만, 그의 결실이다. 학교 모두가 함께 했던 역사 체험 캠페인. 모두가 잘 몰랐던 제주 4ㆍ3 사건은 이제 은행고 학생들에게는 ‘아, 그 사건!’이 됐다. 설령 사건의 진상을 잘 모르겠더라도 2019년도의 비설프로젝트를 경험한 은행고 재학생들에게는 ‘그 때 그’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작은 ‘관심’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기를 소망해본다.
이 프로젝트를 소개한 이유는, 우리 학생들에게 또 다른 성장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그저 성적, 생기부 때문이 아닌 진정한 ‘성장’을 위해, 그리고 ‘공감’과 ‘실천’을 위해 꾸준히 참여한 우리 은행고 학생들이 참 기특하다. 그리고 그들의 성장을 꾸준히 지지하고 박수쳐주고 싶다.
시흥 은행고 교사 송수연
캠페인 주도한 ‘우리는 현재다’ 팀
“친구들 옷·가방에 달린 ‘비설 배지’… 볼 때마다 뿌듯”
첫 시작은 한 친구의 카톡 메시지였다. 여순사건에 대한 질문이 제주 4ㆍ3사건에 언급으로 이어지게 됐다. 나름 2년 동안의 역사 방과후를 해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였는데, 막상 제주 4ㆍ3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처럼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우리가 직접 알려주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것이 ‘비설 프로젝트’였다. 먼저 ‘우리만의’ 활동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 다른 학년의 친구들을 모았다. 그리고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우리 스스로 기획해 나갔다. 이 프로젝트에 핵심 활동인 배지 제작활동에서 우리가 직접 배지 모양을 디자인하게 됐을 때는 정말로 뿌듯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고민도 많이 했다. “과연 친구들이 우리의 활동의 의미를 이해해줄까? 우리의 활동에 많이 동참해줄까?” 이 고민들은 활동을 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우리의 활동에 너무나도 많은 친구들이 참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1학년 영상 동아리팀이 우리의 활동을 도와주었고, 점차 학년 구분없이 많은 자율동아리의 학생들이 우리와 협업해 주었다. 우리의 활동들이 다양한 방면으로 더욱 확장이 돼 갔고, 많은 친구들의 동참과 지지로 성공적으로 끝나게 됐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옷과 가방에 달려있는 비설 배지와 복도마다 붙어 있는 제주 4ㆍ3사건에 대한 내용을 알리는 기림 활동 안내문을 볼 때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 활동을 진행하는 친구들 중에는 역사 교사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다른 분야에 관심사를 두고 있고 단순히 우리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활동에 참여해 주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역사를 우리 스스로 알렸다는, 선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공감했고 이에 대한 뿌듯함을 가졌다.
현재의 고등학교 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일 것이다. 당장의 대학 입시를 앞두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와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언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학기 중의 시간을 쪼개며 활동을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실제로도 배지 판매 활동을 할 때 ‘이거 하면 생기부에 써주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며 지나가는 학생들도 종종 있었다. 물론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책임감만을 가지고 하기에는 벅찬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학생인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것이다. 마지막 고등학교의 생활을 의미 있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강소미·오예림·이소윤·장찬주·정다빈(시흥 은행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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