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부터 구한말, 일제 강점기, 해방 그리고 현재까지…역사의 소용돌이 현장에 국어교과서는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적힌 활자 서적을 누구보다 아끼고 보존하는 사람. 직함 대신 ‘국어교과서 수집가’로 더 알려진 이가 있다. 정부는 물론 기관ㆍ단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대한 양의 국어교과서 수집을 30여 년간 실천해 온 김운기 전 경기도 검도 회장(62)이 그 주인공이다.
김 전 회장은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그동안 자신이 수집해 왔던 수천여 권의 국어교과서를 본보에 소개했다.
김 전 회장은 “나라의 근간이 되는 우리 글을 담긴 서적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며 “정부도 발행만 했지 정작 해당 서적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관심도 없는 상황에서 한 개인으로서 국어서적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이날 김 전 회장은 자택에 모아둔 500여 권의 한적본(韓籍本)을 공개했다.
‘천자문’, ‘류합문’, 다산 정약용이 집필했다는 ‘유형천자문’ 등 그가 공개한 한적본들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일부 부식이 되거나 책 모서리가 닮아 없어진 상태였지만 그는 이 고서적들을 신주보물 다루듯 조심조심 바닥에 펼쳐보였다.
그가 본보에 공개한 서적 외에도 3천여 권에 달하는 희귀서적들은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저장돼 있다.
이들 서적은 ▲조선시대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 등 각 시대 상황에서 발행 주체가 다른 상황에서 세상에 뿌려진 각양각색의 국어교과서들이다.
김 전 회장이 이 같은 수집활동의 시작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초반 어느 여름날. 우연히 헌책방 주인이 한 묶음으로 된 한글교과서들을 고물상에 내다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폐지처럼 취급되는 우리 글인 담긴 서적의 현주소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책들 몇 권을 가져왔다.
이 연민의 마음이 김 전 회장이 한글교과서를 수집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이날 김 전 회장은 광복절을 맞아 일제 강점기 기간에도 가장 탄압이 심했던 1938년도에 발행된 희귀서적 보유 사실을 밝혔다. 그가 말한 서적들은 ‘초등조선어독본’ 1ㆍ2권으로, 김 전 회장은 이 서적들을 볼 때마다 일본의 말살정책 때문에 당시 교육현장에서 사용되지 못한 해당 서적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고 속내를 전했다.
그는 “당시 조선어 사용 금지령 등 탄압이 극에 달했었던 시기에 일본이 명목상 교과서만 발행해주고 이를 교육현장에 배포하지 않았다”며 “세상 바깥으로 나왔지만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단면”이라고 읊조렸다.
김 전 회장의 국어교과서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자신만의 수집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2008년)을 기념해서 전체 도서전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천자문 도서전(2014년) ▲6ㆍ25 동란 도서전(2010년) 등 테마별 도서전을 수시로 개최하며 국민들에게 한글교과서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오는 2020년에는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조선시대 ‘훈몽서’ 도서전 개최를 앞두고 있다.
김 전 회장은 “국어는 우리 말과 글의 시작이며 그 민족의 혼이다. 우리의 얼과 혼이 담긴 국어교과서를 소중히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애국의 첫 번째 길”이라는 신념을 밝혔다.
양휘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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