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3월20일 5개 부처 장관을 전격적으로 경질했는데 그 가운데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최인규가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불과 43세의 젊은 장관인데다가 장관 중에 가장 실세인 내무부장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무부장관은 시ㆍ도지사 임명권은 물론 경찰조직까지 총괄하는 데다 선거를 주관하는 막강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하여 내무부장관 취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할 정도였다. “…지금 형편으로는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이 나라에 안 계신다면 나라는 망하고 만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최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만이 대한민국을 이끌 유일한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 신념은 종교적일 정도로, 이승만이 아니면 나라는 망한다고까지 생각한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올수록 그는 노골적으로 공무원의 선거개입을 독려했고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 지방 경찰국장을 선거용으로 개편했다. 그런데다 자유당은 그에게 ‘자유당을 위해 총알이 되어달라’는 메시지를 날린 것으로 훗날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총알’ 역할을 했고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사상 유례없는 관권선거, 부정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에 당선시켰다. 그러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가 발생했고 곧이어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5·16 군사재판에까지 이어져 1961년 12월21일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총알’ 역할을 자임했던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승만이 아니면 나라가 망한다는 그의 잘못된 신념이 결국 그 자신도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아집 때문에 불행한 말로를 맞이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현재 정치 지도자는 물론이고 사회단체, 심지어 종교단체에서조차 그 아집 때문에 교단의 분란을 일으키는 일도 흔하다.
어떤 시(市)의 A 시장은 주위에서 재출마를 말렸는데도 ‘내가 한 번 더하면 우리 시를 완전히 개혁할 수 있다’며 출마를 강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낙선이었고 무리한 출마로 선거 빚만 잔뜩 떠안고 살다가 신병(身病)까지 얻게 되어 병원 신세를 졌다. 오히려 새로 시장에 당선된 사람이 행정을 개혁하며 칭송을 받았다고 하니 정말 물러날 때가 중요하다.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으며 서울시장을 역임한 고 박세직 씨의 경우는 이럴 때 좋은 교훈이 된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90년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정치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하고 싶은 서울시장. 그런데 그는 두 달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취임하자마자 수서 택지 비리사건이 터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자신은 책임이 없지만, 사태를 수습하려면 시민 앞에 시장으로서 책임지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결심이 서자 출근하는 길에 곧바로 총리실에 들러 사표를 내고 미련 없이 물러났다. 총리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만류했지만 ‘나 아니어도 시장할 사람 많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선한 감동이었다. 요즘은 신선한 감동이 보기 어려워 안타깝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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