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모슬포 가는 까닭-제주시편 1

모슬포 가는 까닭

-제주시편 1

                     - 송재학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벋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따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 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열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민음사, 2007년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슬픈 일을 당하거나 고통에 시달릴 때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도피(逃避)의 행로는 즐겁지 않다. 무겁고 침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망이나 도피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라는 자신의 책에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 나오는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삶에 있어 때론 도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송재학 시인의 시 모슬포 가는 까닭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모슬포로 가는 이유와 심정을 밝힌다. “할 말 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가 눕겠다는 다짐은 지루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뭍’의 일상으로부터 도주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가늠된다. 도주의 장소가 모슬포인 까닭은 철저하게 뭍으로부터 고립되겠다는 강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심정으로 ‘고요’가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마음 안쪽에서 솟구치는 격렬을 억누르지 못해 화자의 감정은 점점 격해진다. 그 막을 수 없는 격함의 심정은 “비명을 숨긴” 모슬포의 길들, “늙은 말의 등뼈”처럼 휘어진 해안, 포구로 밀려드는 매서운 ‘눈설레’ 등의 이미지들을 통해 점점 증식(增殖)된다. 이런 격렬의 감정은 할 말 조차 앗겨 가슴에 쌓인 응어리진 슬픔들의 분출이다. 지루한 뭍의 일상은 내팽개치고, 두 눈을 ‘등대 불빛’처럼 밝혀 홀로 바라보는 모슬포의 겨울 풍경. 그곳에서 ‘격렬비열도의 상처’를 생각하는 시인의 모습은 해방(解放) 그 자체다.

지루함과 슬픔과 상처로 얼룩진 일상으로부터 과감히 도주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분출하는 해방의 구가(謳歌). 그것이 모슬포로 가는 시인의 까닭이라 짐작한다. 송재학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 영혼이 그 겨울과 엄동설한의 폭풍을 숨기지 않는 것, 이것이 내 영혼의 자유분방함이며 호의다. 내 영혼은 동상조차 숨기지 않는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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