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심장
-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며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 사는 소식조차
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사, 2015.
송곳니처럼 뾰족한 싹들이 땅을 뚫고 솟아나는 봄 들판의 초록 풍경은 혁명의 서곡(序曲)을 보는 것만 같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의 근육을 이완시켜 모든 생명들을 춤추게 만드는 봄의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혁명의 두근거림처럼 뜨겁고 아찔하다. 조만간 저 싹들이 피워낼 꽃과 향기의 시간을 어떻게 향유하며 살아가야 할까? 흔히들 사계(四季)를 인생에 비유한다. 씨앗이 발아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시드는 계절의 흐름이 삶의 여정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비유를 하게 된 것이라 이해된다. 그러나 그 비유는 결정론적이다. 봄은 청춘의 시간이고 겨울은 노년의 시간이라는 확신적 짐작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동의할 수도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비유는 유사함의 징후일 뿐이다. 삶은 비유를 넘어서는 기적의 연속이다. 그러나 삶의 기적을 비유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기도 하다. 마종기 시인은 그것을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이라고 말한다.
기적의 연속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다. 마종기 시인은 살아있음의 기적을 ‘봄날의 심장’으로 비유한다. 봄날은 청춘의 한 때를 지시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내재된 생의 의지를 의미한다. 청춘은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모든 것이 들썩이는 격동과 절정의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런 시절엔 “죽고 사는 소식”조차 가볍고 어리석다. 가볍고 어리석었기에 돌아보면 속상한 것이 청춘이다. 그러나 삶이란 속상함만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다. 심장을 비벼 다시 피가 돌게 해야 한다. 여러 개의 봄으로 어쩔 줄 몰라 기절했던 그 시간을 변형시켜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마종기 시인은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어느 해’였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언제나 함께 뛰고 있었던 ‘봄날의 심장’을 비벼 삶의 매순간을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당부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숨 가쁘지만 침착하게 꽃을 피우는 봄날의 기적이 아닐까?
신종호 시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